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서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경제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제학의 정의는 다양하지만, 경제학 교과서에는 일반적으로 ‘사회가 희소한 자원을 관리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라고 쓰여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18세기에 나타나, 경제학의 기원인 된 정치경제학을 분석할 것이므로, 이에 맞게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해 경제학을 정의해 보고자 한다. 

경제학의 역사를 다루는 글에서 경제학의 정의를 스미스를 인용한다는 것은 당연해 보이는 반면, 정치철학자인 홉스의 인용은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이 다루고 18세기에, 정치철학의 한 부분이 점진적으로 자율성과 독립성을 획득해 경제학으로 발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홉스를 이용해 경제학을 정의하는 것이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시도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홉스는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사회 연구에 최초로 적용한 철학자였다. 즉, 홉스에 의해 사회의 자연화가 처음 시도됐다. 실제로, 자연법 혹은 정의에서 출발하는 연역적인 증명을 이용해, 사회 혹은 인간관계에 관한 판단의 과학을 시도했다. 

홉스의 작업은, 홉스가 활동하던 17세기 영국이 ‘과학혁명’의 과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과학혁명이란, 사회의 자연화를 의미하는데, 부연하면, 과학의 발전을 반영하여 사회 역시 자연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로 인해 사회가 더 이상 자연과 구별되는, 종교적 가르침 혹은 도덕적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발견한 법칙과 동일시할 수 있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 자연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배경에서 탄생한 사회과학은 사회를 지배하는 자연법의 발견을 목적으로 삼았기에 자연과학과 비교될 수 있는 ‘과학’의 한 분류로 정의될 수 있었다.

"리바이어던"(1651)에 포함된 홉스의 과학적 분석은, 당시 엄격한 논증의 본보기였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1637)을 따라, 연역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먼저, 태어날 때부터 동등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지닌 추상적 개인을 분석 단위로 설정한다. 즉, 개인들은 혈연, 지연 등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사회관계와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상품으로서 교환될 수 있는 노동력을 담지 하고 있는 신체만을 소유한 존재로 정의된다. 그리고 자기보존에 필요한 재화가 충분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추상적 개인은 사적 이익 추구를 동인으로 삼아 행동한다고 홉스는 전제한다. 희소하지만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재화를 소유해야 하는 개인들은 서로에 대해 경쟁적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정의된 개인 간의 관계는 교환, 거래 등을 포괄하는 계약으로 환원될 수 있다. 즉, 사회는 개인 간 계약관계로 구성되고 사회의 윤리는 정의 같은 내용을 상실하고 단순히 교환관계를 나타내는 계약 조항에 충실해야 한다는 형식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홉스의 이러한 개인의 정의와 전제에서 경제적 인간 “Homo Economicus’의 기원을 발견 수 있다.

홉스의 이론은 ‘죄수의 딜레마’를 이용해 서술할 수 있다. 두 범죄자가 어떤 사건을 모의하고 실행하였으나 둘 다 체포됐다. 체포되기 전에 두 범죄자는 서로 자백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체포 후, 이 두 범죄자는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심문을 받고 있다. 두 사람 서로 간의 의사소통은 가능하지 않다. 이들에게는 다음의 선택이 가능하다. 둘 모두 약속을 지켜 배신하지 않고 자백하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각자 6개월만 복역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 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는 경우, 법정에서 자백을 하지 않은 범죄자의 죄를 증언하는 대가로 석방되는 반면, 자백을 하지 않은 자는 이 증언에 근거하여 유죄판결을 받고 혼자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둘 다 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는 경우, 둘 모두 5년을 복역해야 한다. 두 범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과 그에 따른 보상은 아래의 매트릭스로 표현할 수 있다.



구분                                                                                   범죄자 B

                                                          협력                                                    협력하지 않음

                                                         (자백하지 않음)                                           (자백)


                   .                                        6개월 복역.                                           무죄 방면

                      협력                6개월 복역                                               10년 복역

       (자백하지 않음)

범죄자 A


                협력하지 않음.                           10년 복역.                                               5년 복역

                     (자백)                 무죄 방면                                                  5년 복역



                                                                                                         

두 범죄자는 자백 여부에 대한 의사결정을 동시에 내려야 하며 번복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서술한 죄수의 딜레마는 한 사람이 내린 의사결정의 결과가 다른 사람이 동시에 내리는 의사결정에 좌우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여야 할지를 설명한다.

위에 기술된 상황에서 두 범죄자는 상대방이 어떤 의사결정을 내리더라도, 애초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범죄자 A의 경우를 살펴보자. 범죄자 A는 범죄자 B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애초 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즉, 범죄자 B가 약속을 지키면 6개월 동안 복역하는 대신 무죄로 방면되고, 범죄자 B가 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더라도 10년 대신 5년만 복역하기 때문이다. 범죄자 B의 경우에도, 범죄자 A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당초약속을 어기고 자백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이 딜레마는 범죄자 두 사람 모두 자백을 하고 5년을 복역하는 것으로 해결된다.

협력을 했을 때 혹은 협력을 하지 않았을 때의 보상을,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협력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도록 설계했기에, 위에서 기술된 죄수의 딜레마에서 두 범죄자 모두 협력을 하지 않고 자백을 하지 말자던 약속을 어기는 행동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두 게임 참가자가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가 서로 협력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상기 게임의 결론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기술되는 토마스 홉스의 ‘자연상태’에 부합한다. 즉, 게임 참가자 모두가 협력하지 않는 전략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게임 상대방의 이익을 존중하는 선택인 협력을 거부하고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선택을 하는 상황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지배하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장치로서 홉스는, 개인 간 게임이 이뤄지는 시민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는 독재자 혹은 군주를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자연상태는 군주가 제정한, 강제력을 가진 실정법이 없는 상황으로서, 이 상태에서 개인들은 필연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홉스는 개인들 간의 이해대립을 조정하는 기능이 작동하는 사회는 개인들만으로는 구성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다시 말해 사회를 구성하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아닌 절대 권력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인들로만 구성되고, 스스로 조정하는 기능을 갖춘 사회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홉스는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 됐다. 반면, 스미스는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에서도 내재적으로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모든 개인들이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나 사회 전체적으로도 최상의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보장하는 장치이다. 아담 스미스의 세계에서는 개인 간의 사적 이익 추구과정에서 내재적으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힘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이를 참조한다면, 홉스의 절대자는 사회 외부에 존재하면서 개인 간의 이해대립을 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보이는 손’으로 비유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홉스의 결론은 두 범죄자가 각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상대에 피해를 초래하는 선택인 협력하지 않기를 선택하여 심문하는 경찰에게 모든 피의사실을 자백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이익을 존중하는 선택을 해 자백하지 않고 버텼을 경우의 복역기간인 6개월보다 좀 더 오랜 복역기간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개념에 부합한다. 

같은 게임이 아담 스미스의 세계로 오면, 두 범죄자는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애초에 합의한 바대로 협력하기를 선택하여 피의사실을 부인한다. 두 범죄자는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선택했는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것처럼 이 선택은 두 사람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로 이어진다.

‘죄수의 딜레마’로 불리는 동일한 게임에 적용했을 때, 왜 홉스와 스미스의 이론은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스미스의 이론에서 찾아보자. 스미스 이론에 따르면, 주체들은, 홉스 이론의 주체들에 비해, 스미스가 “도덕감성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는 ‘공감’ (sympathy) 혹은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에서는 ‘교환하려는 성향’ (propensity to exchange )이라고 불렀던 자질을 부여 받았다. 

‘동류의식’(fellow-feeling)으로도 불린 ‘공감’은 스미스에게 있어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감정이다. 한 개인이 느끼는 분노, 공포, 슬픔, 기쁨, 즐거움이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도덕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신이 관객으로서 상정한 타인의 도덕적 판단을 감안하게 되면, 모든 개인들은 감정을 표현할 때,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과 정도를 고려하여, 각자의 감정을 조절하지 않을 수 없다. 

‘공감’은 한 개인이 타인이 겪는 기쁨, 즐거움, 슬픔 혹은 분노 등의 감정을 그 자체로서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감정들을 타인이 느끼는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함으로써, 타인이 표현하는 감정에 대해 우리는 공감을 느낀다. ‘공감’이 작동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서술할 수 있다. 우선, 곤경에 빠진 타인을 보고, 우리는 ‘공감’작용에 의해 그가 느끼는 어려움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공감한 어려움을 당사자가 느끼는 어려움과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의 감정을 적절한 것이라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할 만큼 공감하고 우리가 느낀 감정은 당사자가 느낀 감정과 어느 정도는 일치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 우리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의 상황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우리 스스로가 그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과 완벽하게 같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많은 공감을 갈망한다. 즉, 타인이 공감을 통해 느끼는 아픔이 당사자인 우리가 느끼는 아픔과 부분적으로나마 일치한다는 사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위안을 갈망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유일한 위로가 되는 타인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이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만 어려움이 초래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특정 상황에서 우리가 행한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기초가 되는 ‘공감’의 작용으로 인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동을 판단하는 타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타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사회의 용인이 중요한 동기가 되어, 각자가 타고난 열정을 부정하거나 통제하여 사회적으로 적절한 것이 되도록 한다. 

“도덕감성론”에서 개인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있다. 이 점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빠지는 홉스의 개인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죄수의 딜레마에 등장하는 두 피의자에게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따라 공감능력을 부여하면, 두 피의자는 모두 자신의 행동이 상대방의 공감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협력하기로 한 약속을 지켜 자백을 하지 않는다.

“도덕감성론”에서 인간을 도덕적인 존재 혹은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는 ‘공감’은 “국부론”에서는 ‘교환하려는 성향’으로 변형된다. 인간은 ‘교환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고,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나 시장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국가의 ‘부’는 더 이상 국가를 통치하는 왕의 금고에 있는 금과 은의 양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 개개인이 한 해 동안 소비하는 재화의 양으로 표현된다. 18세기 영국 등 서구 유럽 국가가 경험한, 급격한 부의 증가를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사회적 분업구조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 각자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교환을 하고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교환이 이미 가능한 사회 속에서 ‘교환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개인들은 각자의 판단에 가장 많은 이익이 발생할 상품의 생산에 전념하더라도 생존에 필요한 물건의 획득에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환하려는 성향’은 이렇게 개인으로 하여금 특정 상품생산에 전념하도록 했는데 그 결과는 사회적 분업구조가 형성되어, 개인의 생존은 물론 사회의 유지도 확보됐다. 

이를 죄수의 딜레마에 적용하면, ‘교환하려는 성향’으로 인해 노동의 분업구조에 참가하는 개인들이 특정 상품생산에 전념하더라도 생존이 보장되는 것처럼, 죄수의 딜레마의 두 피의자는 각자 생존에 필요한 선택을 하더라도 두 사람 모두의 생존이 유지될 수 있는 선택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이익 추구에 해를 끼치는 선택인 ‘서로 협력하지 않고 경찰에 자백하기’보다는 자백을 하지 않으려는 서로의 약속에 충실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공감’ 혹은 ‘교환하려는 성향’은, 죄수의 딜레마 경우처럼,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기꺼이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는 물론 거래 상대방에게도 유리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장치다. 이러한 장치로 인해, 스미스의 이론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홉스의 이론에서와는 달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지지 않고 각자 모두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와 감정에 대한 공감능력은 경제주체로서 사회분업 구조에서 선택한 물건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었을 어려움에 대한 공감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공감은 스미스에게 있어 교환이론과 가치론의 근거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공감능력에 의해 형성된 사회 질서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경제주체들이 각자 생산한 제품 간의 가치들의 체계 혹은 상대가격들로 구성되는 가격시스템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개인의 의도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사적 이익 극대화라는 사회적으로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은유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은유는 상대가격체계의 형성을 통해 보다 구체화될 수 있었다. 공감에서 출발한 스미스의 이론이 상대가격체계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됨에 따라 경제학은 과학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석 측면에서 스미스가 이룬 성취도 스미스에게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계기들 중 하나가 됐다.

홉스에서 스미스로 이어지는 전통 속에서 경제학의 탄생을 찾는 것은 경제학의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경제학은 사회적 질서가 홉스와는 달리,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내재적으로 주체들의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의 결과로서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가능성만으로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가지는, 사회과학에 속하는 다른 분과학문과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번째가 경제학의 정의와 관련하여 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두 번째는 경제학이 다루는 변수가 혹은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형성되는 개인들 간의 사회관계가 교환비율이나 가격처럼 측정될 수 있는 변수라는 점이다. 경제학의 도입과 발전의 결과로, 사회적 혹은 정치적 갈등의 해결은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교환비율이나 가격을 발견하는 것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이후로 경제학은 교환비율이나 가격을 결정하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요인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고유 법칙을 발견하는 것에 전문화해 왔다. 요약하면, 경제학의 정의는 크게 두 가지 인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사회의 형성과 유지를 설명한다는 점과 교환비율이나 가격처럼 측정될 수 있는 변수로 나타낼 수 있는 사회관계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by invisibleman 2017. 3. 30. 22:57

18세기에 경제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기에 발생한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유산에 힘 입은 바가 크다. 

과학혁명은 17~18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적 사고의 진화가 급격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뉴턴(Isaac Newton, 1643~1727),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를 거치며 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자연과학은 경험과 관찰에서 확인된 단순한 소수의 명제에서 출발해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어 논리적 정합성이 강조되는 체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발전은 근대 초기 인간사회의 문제 탐구에 관심을 두었던 일부 정치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다. 이들 정치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사회의 탐구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따라서, 우주에서 자연이 유지해야 하는 혹은 물리학의 근본원칙의 적용을 받는 모든 개체가 준수해야 하는 조화로운 질서의 존재를 물리학이 증명하였듯이, 정치철학도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 가능한 인간사회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생각을 달리 표현하면, 만약 인간이,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개인의 활동을 사회 형성과 유지에 적합하도록 자연이 인간에 부과한 도덕 법칙을 인식하고 복종한다면, 자연은, 자연과학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조화로운 질서를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인간활동에서도 생산할 것이라는 믿음이 된다.

과학혁명이 근대 경제학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17세기와 18세기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사용된 ‘시계’ 은유다. 이 시기 자연과학을 대표한 뉴턴의 과학이 시계 은유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학이 시계 은유를 여러번 반복해서 사용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규칙성, 질서, 조화 그리고 예측가능성을 상징하는 시계는 태엽, 스프링, 톱니바퀴 같은 다수의 부품이 상호작용을 통해, 시간 흐름을 측정하는 기구를 구성하는 시스템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태양계와 인체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이용되었다. 

물론,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실질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원인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시계 은유를 사용한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고 표시하는 목적을 수행하지만, 그 목적의 실현은 시계 내부에 있는 수 많은 스프링이나 톱니바퀴 등의 기계적인 운동과 연결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면, 개인의 보존과 인류의 번성 같은 최종 목적은 모든 개인들이 이를 의식하고 노력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법칙에 따라 개인이 쾌 혹은 불쾌의 감정을 느끼고 불쾌는 회피하고 쾌를 추구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시계 은유는 스미스 이전 경제학적 사고를 대표하는 중상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상주의자들은 케네와 스미스가 경제학의 틀 안으로 가지고 온, 윤리적, 법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특정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해외 무역의 적절한 규제를 통해, 국가의 부를 증가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들이 원하는 산업으로 지출과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세금, 포상금 등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러한 정책제안은, 쾌락을 초래하는 요인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성향을 기본 부품으로 이루어져 조작될 수 있는 기계장치로서의 경제 시스탬이라는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과학혁명과 함께, 18세기 경제학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자연법 사상의 발전이었다. 자연법은 이성이나 도덕감정과 같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정의 혹은 옳음에 대한 규칙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적 속성으로서 이성과 도덕감정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정의된 인류의 윤리적 이상을 표현한다. 자연법은 그 권위를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군주의 명령이나 의지 혹은 사회의 관습 같은 사회적 존재에서 찾지 않는다. 자연법은, 자명한 방법으로 드러나는 옳고 정당한 것에 관해 이성과 도덕감정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 혹은 인식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권위를 도출한다. 따라서, 자연법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관습법 혹은 정부의 입법과정을 거쳐 제정된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된다.

과학적 편향을 가진 중상주의자들이 활동한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경제이론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즉,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정의의 개념에서 도출된 공정가격의 개념을 사전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상업거래에서 정의가 담보돼야 한다는 중세의 법학자와 교부(scholars)의 생각을 근대 초기의 자연법 법학자와 도덕이론가들은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많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경쟁하는 자유로운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생산자가 부담해야 하는 생산비용과 시장에서 이뤄지는 판매자의 서비스에 대한 공정한 보상 그리고 구매자가 평가하는 해당 재화의 적절한 가치 등에 상응하는 공정가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경제현상에 적용된 자연법의 개념은 중상주의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라, 근대 경제학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자연법은 중농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간과 사회관계에 대한 경험에 이성을 적용해 발견해야 하는 정확한 규칙의 체계로, 그리고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는, ‘공정한 관객’이 느끼는 정의의 감정으로 진화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영향으로, 초기 근대 경제학에는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과학적인 사회법칙의 개념이 섞여 있다. 이로 인해, 초기 경제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의 적용을 통해 경제부문에서 발견해야 하는 질서와, 인류의 번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법에 의해 규정된 경제체계를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이 법칙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공존은, ‘보이지 않는 손’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소위 ‘경제신학’을 창조했다. 즉, 이성의 작용을 통해 발견한 자연의 규칙에 따라 개인은 이익을 추구해야 하나, 동시에 생존을 개인들 간에 형성되는 교환관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에서는, 개인들 간 관계의 매개체인, 개인들이 생산한 상품들이 생산에서 소비로 이어지는 자연적인 순환을 하면 이것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으로 귀결된다는 결론에서 18세기 경제학은 자유로울 수 없었다. 



by invisibleman 2017. 3. 27. 23:04

위기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 ‘crisis’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 어원부터 ‘삶 또는 죽음’, ‘옮음 또는 그름’, ‘구원 또는 파멸’ 등 의학, 정치, 종교의 분야에서 상황을 일시에 변화시킬 수 있는 선택, 판단, 또는 결정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2007년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는 미국, 유로지역 등의 중앙정부가 채택한 양적 완화 정책이 상황 전환을 가져오는 선택 대상이 되었다. 양적 완화는 미국과 유로지역의 중앙은행이, 자산의 부실화가 금융기관의 자금공급 능력을 제한해 각국 경제가 신용위축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자산을 자신이 발행한 통화로 대체한 것이다. 양적 완화의 결과, 금융시스템은 부실자산의 대규모 발생에도 불구하고, 신용공급 능력을 급격하게 축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과 유로지역은 가계에 대한 부동산대출의 부실화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1929년 대공황과 같은 최악의 상황으로 심화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서 자산교환은 이미 18세기 프랑스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 루이 14세가 남긴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존 로(John Law)의 경제개혁이 바로 그러한 자산교환에 근거해 있었다. 로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은 자산교환 외에도 은행설립을 통한 은행권 발행과 이자율 하락을 중요 요소로 포함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존 로의 경제개혁 프로그램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경제개혁이 가지는 정치적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루이14세가 72년의 재위 후에 사망한 1715년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재정이 붕괴된 경제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루이 14세가 중상주의 정책을 사용해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한 결과,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기를 형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재위기간 동안 당시 프랑스 북부에 있던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동부에 있던 신성로마제국 등을 대상으로 '스페인 계승 전쟁'을 포함해 모두 5차례의, 영토확장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전쟁을 치뤘다.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통해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강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의 결과로 발생한 전비와 전쟁 배상금이, 그의 호화로운 궁정생활로 인해 이미 어려웠던 왕국의 재정에, 어려움을 부과했다. 이러한 연유로 정부의 부채가 증가해, 그의 사후 루이 15세가 즉위했을 때에는 당시 프랑스의 연간 총생산액 규모에 버금 가는 수준에 이르렀다.  


당시 재정의 수입과 지출을 중심으로 프랑스의 재정위기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재정지출은 왕실 경비, 공무원 임금, 군대유지비용 등 일상적인 지출을 뿐만 아니라 영토확장을 목표로 하는 전쟁의 경비와 전쟁 후 일정기간 동안 부담해야 했던 전쟁 배상금 등을 포함했다. 그리고 정부의 부채에서 발생하는 원리금을 지급하는 것도 재정지출의 중요 항목이었다. 


반면, 재정수입은 직접세(소득세나 재산세), 간접세(소비세), 그리고 왕실 영지에서 봉건적 지대형식으로 거둬들이는 곡식 등 실물로 구성된 수입 등으로 구성됐다. 소득세 혹은 재산세 같은 직접세는 개인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에게 부과됐다. 그래서, 정부는 직접세로 거둬들일 전체 규모를 산정하고 이를 다시 지방별로 배분했고 지방정부는 정부가 산정해 할당한 직접세 규모를 받아 산하 지역별로 다시 나눴다. 할당받은 직접세 규모를 지역정부가 보다 작은 행정단위별로 배분하는 작업은 직접세를 부담하는 행정단위에 이를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소비세와 물품세 같은 간접세는 정부를 대신해서 징수업무 청부계약을 체결한 사업자 혹은 개인이 징수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680년대 조세청부계약은 통합 혹은 일반 조세청부라 불리는, 청부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특정 재화의 소비에 대해 부과된 세금을 징수할 권리는 경쟁입찰에 부쳐져 최고금액을 제시한 사람에게 통상 6년인 계약기간 동안 양도됐다. 입찰자는 조세징수권을 양수받은 기간 동안 왕에게 연간 고정된 금액을 납부했다. 청부업자는, 정부에 지급해야 할 약정금액 대비 조세 징수금액이 부족할 경우에는 부족금액을 그가 직접 보충해야 했지만, 초과할 경우에는 초과금액을 조세청부업자가 이윤으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조세청부업자는 기업가처럼 필요한 만큼 고용인을 동원해 가능한 한 많은 금액을 징수했다. 


식민지에서 유래한 상품처럼 소비세를 새롭게 부과해야 하는 문제는 별도의 조세청부계약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처음 도입된 담배에 대한 소비세 징수는 소금처럼 정부가 예전부터 독점해 온 물품에 대한 소비세의 징수와 같은 방식으로 청부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소비세의 징수 측면에서는, 주요 소비재의 공급과정을 독점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국왕의 수입 규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각 세금에는 이를 징수하는 징수 담당자와 이를 재원으로 하는 정부의 지출을 관리하는 재정 담당자로 구성된 부서가 대응하고 있었다. 징수담당자와 재정 담당자는 정부의 고용인(직접세)이거나 조세청부업자 혹은 그의 고용인이었다. 재정 담당자는 정부가 발급한 지급명령서에 따라, 같은 부서에 속하는 징수 담당자가 징수한 세금의 일부를 지출한다. 그리고 남은 잔액은 파리에 있는 왕실 재정 담당부서로 보낸다. 이처럼, 정부지출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다양한 등급의 재정담당자에게 책임이 분산된 분권화구조로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는, 재정위기와 직접 관련된 부채 상황을 살펴보자. 부채는 먼저 장기채무와 단기채무로 나뉜다. 국가가 장기로 채무를 조달하는 수단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편의상 장기채 타입 1과 장기채 타입 2라고 하자. 장기채 타입1로 표시한 수단은 원리금이 연금처럼 특정인의 생애동안 혹은 영구히 지급되는 채권이다. 이러한 채권의 보유자에게 지급되어야 하는 원리금의 재원은 특정 세금 수입에서 조달됐는데, 그로 인해 채권의 원리금은 해당 세금의 징수원에 의해 직접 채권 보유자에게 지급되거나 파리에 있는 채권 원리금 지급업무를 총괄하는 사무실에서 지급됐다. 채권의 보유자는 채권소멸시킬 목적으로 원금 상환을 정부에게 요구할 수 없었다. 반면, 채무자인 정부는 부채를 소멸할 수 있는 옵션을 가졌는데, 채무소멸 옵션을 선택할 때는 해당 원금을 상환함으로써 부채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장기채 타입2로 표시된, 장기차입의 두 번째 형태는 관직 판매다. 예를 들면, 1689년부터 1712년까지 파리에 위치한 시장을 대상으로 3,000개 이상의 관직이 루이 14세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재정수입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관직을 예를 들면, 포도주 품질을 조사하는 관직, 돼지 혀 부위 품질 조사 관직, 세느 강으로 도착한 배에서 기름이나 포도주 등이 담긴 통을 하역하는 것을 관리하는 관직, 일단 하역한 통을 운반하는 과정을 관리하는 관직 등이다. 정부가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판매한 관직을 구매한 개인은 해당 관직에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관리가 되어 왕의 위임이나 허가를 받지않고 당연한 권리로서, 그 관직에 부여된 다양한 특권(특히 그의 활동 관련 수수료 혹은 세금을 부과하는 권리)을 누렸다. 관직이 판매되면 국왕은 판매대금에 이자를 지급해야 했는데, 이는 관직에 대한 임금의 형태를 가졌다. 정부의 재원조달 수단으로서 판매되는 관직의 보유자는 해당 관직에 지급되는 임금의 인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관직 판매와 연관된 채무는 국왕이 원금을 상환하거나, 관직을 보유한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관직의 폐지와 함께 소멸됐다. 


부채의 형식으로서 관직과 연금은 모두 양도되거나 판매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래비용이 크게 높았다. 또한, 둘 다 부동산처럼 여겨져 담보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단기채무는 정부가 발행한 지급명령서의 형식을 가졌다. 지급명령서는 정부에게 제공되어 소비된 재화와 서비스의 대금을 지급하는 수단으로서, 해당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한 경제주체를 수익자로 하고 특정 조세징수 담당자를 지급자로 하는, 정부 재무부서가 발행한 환어음 형태를 가진다. 정부에 물품을 납부하고 대금을 대신해 정부의 재무부서가 발행한 지급명령서을 수령한 경제주체는 지급명령에 언급된 조세징수 담당자에게 이를 제시하고 대금을 지급 받았다. 하지만, 1년 혹은 이를 초과할 수도 있는 지급명령서의 지급기한으로 인해, 지급명령서의 수취인은 금융업자에게서 지급명령서를 할인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관행적으로 진성어음이었던 지급명령서는 1년 혹은 이를 초과하는 미래에서 발생할 수입을 담보로 정부가 차입하는 경우에도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 경우의 지급명령서는 융통어음의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어서 프랑스 재정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프랑스의 부채 규모는 28억 '리브르’였다. 그런데 이러한 규모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국내 총생산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28억 리브르의 부채는 조달수단에 따라, 앞서 언급한 바처럼 장기채 타입 1과 2 그리고 단기채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장기채 타입 1을 이용해 조달한 채무 금액은 10억 6천8백만 리브르이고, 이에 대응하는 연간지급이자 금액은 4천 5백만 리브르였다. 장기채 타입 2를 이용해 조달한 금액은 8억 3천만 리브르였고 이에 대응하는 연간 지급이자 규모는 4천1백5십만 리브르였다. 단기채를 이용해 조달한 금액은 9억 2천만 리브르에 이르렀고 이에 대응하는 연간 지급이자 규모를 연 이율 4%로 추정하면 3천 6백만 8십만 리브르였다. 28억 리브르에 대한 연간 이자 부담액은 모두 1억 2천 3백 3십만 리브르에 이르다.


반면, 연간 세입규모는 1억 6천6백만 리브르고 공무원 임금, 군대 및 요새 유지에 소요되는 국방비 등 일반 경상세출규모는 7천백만 리브르였다. 세입과 세출의 차이인 세입 잉여금 9천5백만 리브르 전부를 이용해 축적된 채무의 연간 이자를 지급한다고 해도, 이자 지급에 부족한 2천 8백 3십만 리브르를 매년 차입해야 했다. 연간 생산액 혹은 정부의 총부채규모의 1%에 해당하는 규모의 부채가 매년 증가하는 셈이다. 실제로는, 상기 잉여금에서 자본지출이나 전쟁비용 등 예기치 못한 지출 등을 제외한 금액만이 실제로 상기한 부채의 이자를 지급하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기존 채무에 대한 이자지급을 위해 새롭게 차입해야 하는 규모도 훨씬 더 클 수 밖에 없다. 이 나라의 재정 수입과 지출 구조에서는 재정수지 흑자를 이용해 부채를 축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재정수지 흑자로는 이자 지급도 감당할 수 없어 부채 규모가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 운영은 지속될 수 없다. 이 나라의 상황을 위기라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다. 재정위기라 불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으로 재정 위기의 해결방안은 재정 수입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는 재정수지 흑자 규모를 확대해 정부 부채 원리금 상환 규모를 늘리거나 기존 채무에서 발생하는 원리금 지급을 위해 매년 증가하는 정부 채무 규모를 축소할 수 있을 뿐이다. 재정 적자와 정부 부채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정부지출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국방비 역시 줄어들었는데, 이로 인해, 루이 15세 재위 기간, 프랑스는 이웃국가들과의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면서 지급해야 하는 전쟁 배상금이 급증해 오히려 재정위기가 심화됐다.


이러한 배경에서 프랑스 정부가 취한 재정위기 극복 방안은 재판소를 설치해 채권자의 재산형성과정을 조사해 공공기금 유용 등의 범죄가 확인되면, 채권자의 범죄를 기소하고, 군주의 영향력 하에 있는 법정에서 유죄를 선언해 벌금 명목으로 그들이 보유한 정부에 대한 채권을 압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가장 큰 채권자들은 정작 재판소에 기소조차 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비록 재판소에서는 채권자인 금융원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많은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였지만, 프랑스 정부는 법원의 결정을 바탕으로 벌금을 징수하기 보다는 주요 채권자인 금융업자들과는 비밀리에 협상을 통해, 법원이 선고한 금액보다 훨씬 더 작은 금액을 받고 사면해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채무조정의 결과는 화폐부족에 따른 경제활동 위축을 초래함으로써, 프랑스가 처한 경제문제를 심화시켰다. 징세청부계약을 통해 화폐를 축적해 금융업자로 성장한 개인들은 정부에게 자금을 대여하고 상응하는 채권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금융업자로서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은 상공인들에게 자금을 대여하거나 투자를 했다. 그런데, 정부의 채무조정 과정에서 금융업자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정부에게 대여한 채권을 압수당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금융업자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상공인들은 국왕이 그들에게 부여한 특혜를 누리는 산업 및 교역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는 다시 정부의 조세수입 축소로 이어졌다. 재판소 설립을 통한  정부 채무 문제해결은 음성적으로 고리대금업만 성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고리대금업은 신용도가 최상인 어음에도 25 내지 30퍼센트 정도의 할인율을 적용했다고 한다. 국채의 수익률이 4% 정도였으니, 고리대금업의 수익율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상기한, 루이 14세 사후 재정위기에 처한 프랑스 정부가 재정건전성 개선을 위해 수행한 노력은 의도한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존 로(John Law)가 등장한다. 존 로의 등장에는, 그 누구도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언급한 재판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재판소를 통해 금융업자들이 당시 프랑스가 처한 재정위기의 주범으로 부각되면서, 금융업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축소됐다. 기득권 세력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틈을 이용해, 존 로는 자신이 위기극복 방안으로 제안한 개혁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실행할 수 있었다.


로의 개혁 프로그램은 상기한 재정위기 해소뿐만 아니라 화폐개혁도 포함하고 있었다. 로에 의하면, 프랑스의 경제적 어려움은 재정위기뿐만 아니라, 금화와 은화 같은 금속화폐를 토대로 하는 화폐제도와도 관련 돼 있었다. 금속화폐는 은광이나 금광이 본토나 식민지에서 추가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화폐공급을 늘리지 못한다. 로는, 화폐의 공급이 충분하지 않으면 국가내 존재하는 노동을 포함하는 생산요소와 자원을 제대로 이용할 수 없고 그로 인해 국가경제는 그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재정위기와 화폐제도에서 기인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존 로가 제안한 해결방안인 시스템은 1) 금화나 은화로 교환될 수 있는 은행권을 발행하는 은행(General Bank)과 2) 식민지를 개발하고 해당 식민지와의 교역에 있어 독점권을 부여받고 정부로부터 조세징수 청부업무를 위탁받은 미시시피 회사로 구성됐다. 


이러한 구조를 가진 시스템은 재정위기와 관련하여,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채무증서를 보유한 개인들을 대상으로 정부의 채권을 미시시피 회사가 발행한 주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해법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 경제가 겪고 있던, 또 다른 어려움인 유동성 부족의 문제는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의 도입으로 해결하려 했다.


개인들이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로가 설립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주식의 보유로부터 안정적인 배당수익뿐만 아니라 주식 가격 상승을 통한 자본수익의 기회까지 보장되어야 했다. 그런데, 일정한 수준의 배당이 보장된 상황에서 주가의 상승은 배당수익율을 낮추고 이는 다시 실질 이자율을 하락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스템의 다른 한 축인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으로 인해 화폐공급이 증가한 상황에서, 실질 이자율의 하락은 농업과 상공업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당시 국제무역을 주도하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에 맞서 경쟁하도록 하는 기반을 확충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기대됐다.


로의 회사를 일반적으로 미시시피 회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회사가 설립 초기에 미국 미시시피강 유역인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개발과 교역, 그리고 캐나다 비버 모피 무역의 독점권을 사업 포트폴리오로 보유했기 때문이다, 이후, 회사의 사업 포트폴리오는 세네갈, 인도, 중국, 북아프리카 등 지리적으로 다양한 식민지 개발과 무역으로 확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품세와 직접세 등 정부 조세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금의 징수업무를 대행하는 것도 포함했다. 이러한 조세징수 청부 계약을 통해, 회사는 당시 프랑스 정부의 조세수입의 90%를 징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과 은으로부터 금화와 은화를 주조하는 조폐창 역시 정부로부터 운영을 인수받아 수입원으로 이용하게 됐다. 이러한 사업포트폴리오로 인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안정적인 배당수입은 물론 주식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여력을 갖춘, 누구나 보유하고 싶어 하는,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보장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려하면, 일반적으로 자산 가격의 급등과 급락에 적용되는 설명인 수익성에 대한 기대와 실망으로 미시시피 회사 주식의 가격 급등과 급락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 내포돼 있는 바와 같이, 회사는 주식 발행을 통해 자본을 조달했다. 주식발행은 네 차례 이뤄졌다. 회사 설립 시점인 1717년 6월부터 1719년 말까지 이어진 주식 발행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1. 1717년 6월-1718년 12월 (신주상장): 액면가 500 리브르에 200,000주가 발행됐다. 1억 리브르의 주식발행대금은 액면금액으로 평가된 정부가 발행한 채권으로 지급되도록 규정됐다. 

2. 1719년 6월: 액면가 500 리브르에 10%의 할증이 더해져 발행가액은 550 리브르였고 50,000주가 발행돼 주식대금은 2천 7백 50만 리브르였다. 주식 인수를 장려하기 위해, 한 주당 50 리브르의 계약금을 지급하면, 나머지 인수대금은 20개월 할부로 지급할 수 있었다.

3. 1719년 7월: 액면가 500 리브르에 100%의 할증이 더해져 발행가액은 1,000 리브르였고 발행물량은 50,000주로 주식대금은 5천만 리브르였다. 이 발행에서도 주식인수를 장려하기 위해, 주식대금은 20개월 할부로 지급할 수 있었다.

4. 1719년 9월-10월: 액면가 500 리브르에 할증이 더해져 발행가액이 5,000 리브르였고 300,000주가 발행돼 주식대금은 15억 리브르였다. 주식대금은 10개월 할부 혹은 3분기 할부로 지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주식발행을 '어머니'발행이라 명명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발행은 각각 '딸' 그리고 '손녀' 발행으로 명명했다.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번째 발행에서 주식 1주를 인수하려면 첫 번째 발행된 주식 즉 어머니 주식 4주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발행에서 주식  1주를 인수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발행된 어머니 주식 4주 그리고 딸 주식 1주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반면, 네 번째 발행은 이전의 발행과는 달랐다. 즉, 네 번째로 발행된 주식의 인수에는 이전에 발행된 주식의 보유라는 조건이 적용되지 않았다. 대신, 주식을 인수하려는 개인은 주당 일정 금액으로 정해진 계약금을 지불하고, 회사로부터 증명서를 받았다. 이 증명서에는 계약금액에 상응하는 주식 인수에 필요한 할부금을 완납하면 해당 금액에 대응하는 수량의 주식을 배정하지만, 만약 할부금을 완납하지 못하면 계약금과 기 납입 할부금은 몰수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두번째, 세번째 그리고 네번째 발행된 주식의 대금은 현금지급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첫 번째 발행인 ‘어머나 발행’과정에서는 주식인수대금을 정부가 발행한 채무증서로 지불하도록 규정했다. 그에 따라, 회사의 주주가 된 채권자는 보유하던 정부채권과 교환으로 회사 주식을 자산으로 보유하게 된 반면 회사는 주식발행 대금으로 현금 대신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보유하게 됐다. 회사가 보유한 정부 채권에 대해, 정부는 회사와 협상을 통해 이자율 수준을 더 낮출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회사가 인수한 정부채권에서 유래하는 원리금의 부담을 정부는 축소할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채권자들이 회사의 주식 인수대금을 정부가 발행한 채권으로 지불하는 것은, 채권자의 입장에서는 평균 4.5% 이자율을 가진 정부 채권을 회사주식으로 자산을 교체하는 것을 의미했다. 원금상환에 대한 위험이 거의 없는 국가가 발행한 채권을, 도산 위험이 없지 않은 미시시피 회사의, 매년 주당 200 리브르의 배당금이 지급되는 주식으로 채권자들이 교체하는 이유는 유동성 차이 때문이었다. 즉, 채권은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었으나, 할인율이 60%에 이를 정도로 유동성이 낮았던 반면, 주식은 유동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주가 상승에 따른 자본이득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시시피 회사의 관점에서, 회사주식의 발행대금으로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받아들인 결과로 회사의 수익원은  1) 식민지와의 교역, 2) 세금징수 업무 외에도 3) 보유 정부채권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이 더해졌다. 


미시시피 회사가 주식 발행으로 자본금을 조달했지만,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기 위해, 정부에 대가로 지급해야 한 자금의 재원은,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은행으로부터 차입에 의존했다. 이 점을 부연하기 위해서 당시 화폐제도와 로가 구축한 시스템의 다른 한 축인 은행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당시 화폐제도는 교환의 매개이자 지불수단인 주화와 가격과 채권/채무 표시 수단인 회계단위로 이뤄져 있었다. 첫 번째 요소인 주화는 애초에는 정부가 운영하였으나, 로의 시스템 성립 이후 미시시피 회사가 운영하게 된 조폐창에서 금이나 은을 기반으로 주조됐다. 주화는 법정화폐로서 개인들이 재화나 용역을 구입하거나 채권/채무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주화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데 주화는 표준화된 도안에 따라 주조됐지만 회계단위로 얼마에 상응하는지를 표시하는 어떠한 숫자나 문자를 포함하지 않았다.


두번째 요소인 회계단위는 리브르라는 이름으로 정의됐다. 상품의 가격뿐만 아니라 주화의 가치 그리고 화폐의 지급으로 청산되어야 하는 각종 채권/채무는 이 회계단위로 표시됐다. 


주화와 회계단위는 이중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두 가지 관계 모두 정치적으로 다시 말해 당시에는 국왕에 의해 결정됐다. 첫 번째 관계는 국왕이 직접적으로 주화를 종류별로 일정량의 회계단위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관계는 조폐창에서 주화에 함유될 금이나 은의 양을 결정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금이나 은의, 화폐단위로 표시되는 가격을 참조하지 않고 결정될 수 없었기 때문에, 첫번째 관계와 두번째 관계 중 적어도 하나는 전적으로 자의적이 될 수 없었다. 

상기한 주화와 회계단위의 역사적 사례를 인용하면, 로의 시스템이 적용된 프랑스는 ‘리브르’라는 회계단위를 사용했고 조폐청에서는 '에퀴(Ecu)'라는 이름의 은화가 주조됐다. 에퀴와 리브르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1 마르크 (244.752 그램)의 표준 은은 8개의 에퀴로 주조됐다. 그리고 에퀴는 회계단위로는 5 리브르와 동등하다고 규정됐다. ‘루이’라는 이름의 금화도 유통됐는데, 루이 14세 시기에는 일정 순도를 가진 금 6.75 그램으로 주조돼, 10 리브르의 회계단위에 대응했다.


이러한 화폐제도 하에서 로의 은행은 1716년 5월에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됐다. 주식회사의 형태로 설립된 은행의 자본금은 은행 주식을 발행해 시장에 상장하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즉, 5,000 리브르의 액면가격에 1200주가 공급됐다. 주식대금으로는 현금 외에도 국가가 발행한 채무증서로도 납부할 수 있었다. 당시 국가의 채권은 액면 대비 60% 할인된 금액으로 시장에서 유통됐는데, 주식인수 대금으로 국채를 납부할 경우에는 액면 금액으로 평가받았다. 보다 많은 개인이 주식보유를 수요할 수 있도록, 주식대금의 1/4만 납입하면 일단 주식을 인수하고 나머지 주식대금은 추후에 납부할 수 있게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따라서, 현금 500 리브르만 있어도 이를 이용해 시장에서 60% 할인된, 액면 금액이 1,250 리브르인 국채를 매입하고, 액면 금액이 은행주가의 1/4인 상기 국채를 다시 대가로 주고 은행 주식 한 주를 실제로 인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장에서 주식공개를 통해 거둬진, 은행의 초기 자본금은 현금 375,000 리브르와 국채 1,125,000 리브르로 구성됐다. 보유 국채에 4%의 이자율을 적용할 때 발생하는 이자수입 45,000 리브르는 은행의 운영자금으로 사용됐다. 나머지 주식발행 대금도 차후에 주주들에 의해 납입됐다.


은행은 개인들로부터 예금을 주화로 받고 이에 상응하는, 에퀴로 지급할 것을 약정하는 요구불증서, 즉, 은행권을 발행했다. 달리 표현하면, 은행권은 은행에 예치된, 일정 수량의 에퀴에 대한 요구권이었다.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10 에퀴, 100 에퀴, 그리고 1,000 에퀴 등 세 가지였다. 은행권 발행 이외에도 은행은 어음할인, 외환매매, 당좌예금계좌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했으나, 대출업무와 무역금융업무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성어음뿐만 아니라 융통어음도 어음할인 대상이 될 수 있었기에 대출업무가 은행의 업무에서 실제로 배제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인수합병을 통해 합쳐진 미시시피회사에 대해서는 사업포트폴리오 확대에 필요한 자금을 은행권 발행을 통해 공급했다.


은행의 지속가능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수익성이 확보되기 위해서는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이 예치된 에퀴로 상환되기 위해 즉각적으로 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통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일정기간 동안 상환부담에서 자유롭게, 예치받은 주화의 양의  일정 배수에 해당하는 은행권을 발행해 유통시킴으로써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통화량 증가를 통한 상공업의 발전과 이를 통해 발생할 조세수입 증가를 기대하며, 존 로의 경제개혁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한 정부는 은행권의 유통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예를 들면, 1716년 10월 7일 칙령에 의해, 각종 세금 징수업무를 맡은 관리들과 징세청부업자들은 자신에게 제시된 은행권을 에퀴로 교환해줘야 했다. 이 칙령은 수 백 명의 조세 징수관리들과 징세 청부업자들 등으로 이뤄진 정부 네트워크를 로가 설립한 은행의 지점으로 만들고 그리고 은행권이 세금납부용 법정통화처럼 통용된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로의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은 정부에게 화폐주조 이익를 통한 재정수입의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 재정수입에서 프랑스 정부가 로의 은행을 적극 지지한 또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루이14세 사후의 시점에서, 은 1 마르크는 주조창에서 8개의 에퀴로 교환됐다. 그리고 1에퀴는 시장거래나 채무관계에서 5리브로로 인정됐다. 그런데, 1718년 6월부터는 에퀴를 정의하는 새로운 규정이 적용됐다. 즉, 새 규정에 의해, 은 1 마르크에서 10개가 주조되고 액면 금액은 6 리브르로 상승한 새로운 에퀴가 발행됐다. 그와 함께, 6월 이전에 주조된 은화는 8월 1일까지는 6 리브르의 법정가치가 부여되지만, 그 이후에는 경제생활에서는 사용될 수 없도록 어떤 가치도 부여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치도 부가됐다. 8월 1일 이후에도, 예전에 주조된 에퀴는 조폐창에서 5 리브르로 교환될 수 있었다. 에퀴를 정의하는 은의 함량을 축소할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증가한 회계단위와 연결시키는 조치는 정부가 소유하던 은으로 만들 수 있는 주화의 양을 늘릴 뿐만 아니라 회계단위로 표시되는 금액도 상승시켜 정부의 채무 상환능력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반면에, 에퀴로 표시된 은행권은 상기한 화폐조작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에퀴의 주조와 함께, 100 에퀴의 은행권은 600 리브로로 계산됐다. 뿐만 아니라, 100에퀴 은행권은 세금납부시에는 600 리브르의 가치를 가지는 법화로 작용했다. 그리고 조폐창이나 세금 징세 관청에서는 600 리브르의 새로운 에퀴로 교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 자산가치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은행권이 은화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됐다. 비록 은행권의 소유자는 은의 보유에서 획득할 수 있는 화폐주조 이차를 직접 얻을 수는 없지만, 은행권에 상응하는,  회계단위 리브로로 표시되는 금액의 증가를 허용하는 정부 정책으로 인해, 은행권 소유자는 화폐주조 이차에 상응하는 이익을 확보할 수는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은화의 평가절하가 루이 14세 사후에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은행권을, 화폐잔고를 보유하는 매력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1718년 말에는 프랑스 정부는 은행을 국유화했다. 국유화는 프랑스 정부가 주식의 액면가격(5,000 리브르)에서 모든 개인 주주로부터 은행의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작업은 1718년 12월 4일 포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개시됐다. 국유화 이후 은행의 운영은 여전히 존 로에게 맡겨졌으나, 모든 수익은 왕실 금고로 넘겨졌다.

국유화 시점에서 은행의 은행권 발행잔고는 4천만 리브르에 달했다. 은행은 주화 보유량을 은행권 발행잔고의 50%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었다. 1716년부터 1718년까지 매년 상반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배분된 은행의 배당금 지급 총액은 주당 615 리브르에 달한다. 이는 3년 동안 주식보유를 통해 초기에 발행된 주식의 액면가격 5,000리브르 대비 연간 3.9%의 수익률을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는 존 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석했다. 이하에서는 로의 시스템의 작동을 분석하고자 한다. 1720년 존 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회사와 은행은 합병하였다. 그리고 시스템은 절정에 도달했고 회사의 주가도 최고 정점에 있었다. 시스템이 절정에 있었다는 사실은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의 성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채권자가 보유한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채무증서를 로가 설립한 회사의 주식으로 대체한 것이다. 두 번째는 금속화폐를 로의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으로 대체한 것이다.


회사와 은행의 첫 번째 주식발행에서 인수대금을 주식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에서 시작된 정부의 부채를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하는 작업은 1719년 8월 27일 로의 회사가 지방 세무징수 업무를 대행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됐다. 


지방 세무징수 관청은 당시 프랑스에서 물품세의 대부분을 징수하던 기관이었다. 물품세는 당시 정부 조세수입에서 30%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와 로의 회사가 체결한 지방 세무징수 관청의 업무 청부계약은 당초 9년이었다가 같은 날 50년으로 계약기간이 연장됐다. 물품세 청부 계약 내용은 계약기간 동안 회사는 지방 세무징수 관청이 담당하던 물품세를 대신 징수하고 그 대가로 매년 정부에게 5천 2백만 리브르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물품세 징수 청부계약의 체결과 함께, 회사는 정부에 12억 리브르의 융자를 제공했다. 정부에 대한 회사의 대출에는 국채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던 4%의 이자율보다 낮은 3%의 이자율이 적용됐다. 12억 리브르에 대한 연간 이자 3천 6백만 리브르는 연금 형식으로 회사에 지급돼야 했다. 12억 리브르의 대출금은 9월 17일 그리고 10월 10일 을 거치면서 16억 리브르로 증가했다. 연간 3천 6백만 리브르(이후 4천 8백만 리브르로 증액)는 실제로는 회사가 지방 세금징수청의 업무를 대행하면서 회사가 국가에 매년 지급해야 하는 5천 2백만 리브르에서 공제됐다. 따라서, 소비세 징수 청부 계약과 정부에 대한 융자를 합쳐 보면, 이는 결국 징수를 대행한 정부의 조세수입을 담보로 회사가 정부에게 자금을 대출한 것이다.


로의 시스템이 1720년에 붕괴되어 실현될 수는 없었지만, 정부는 16억원의 대출금을 정부 부채를 축소하는데 사용할 예정이었다. 장기채의 형식으로서 영구채나 판매된 관직에 대한 원금 상환은 정부의 콜 옵션을 포함했다. 즉, 채권자는 원금 상환을 요구할 수 없었지만 채무자인 정부는 언제나 상환할 수 있었다. 


상환절차는, 정부가 상환하기로 결정한 채권의 보유자는 국가의 재무 담당 부서로부터 채권액에 상응하는 금액이 적힌 회사 앞 환어음을 수령해서,  회사에 환어음을 제시하면, 회사는 채권자의 선택에 따라 금이나 은 혹은 은행권으로 지불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부에 대출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는 이자율 3%의 채권을 팔아 12억 리브르를 조달하려고 했다. 하지만, 회사는 자금조달 계획을 변경해 채권 대신 주식을 발행했다. 앞에서 언급한 네 번째 주식발행이다. 주식 발행을 통한 회사의 자금조달과 회사가 조달한 자금을 사용하는 정부의 부채 상환 계획이 발표되기 전인 8월 26일 회사 주식 가격은 3600 리브르였다. 하지만, 9월 9일에는 5350 리브르로 상승했다.  이틀 후, 회사는 현금으로 주식 100,000주를 5,000 리브르에 팔아 5억 리브르를 조성했다. 이 주식발행의 성공은 9월 26일과 10월 2일 같은 가격에 각각 100,000주씩을 발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1719년 9월과 10월 동안 조성된 주식발행 대금은 15억 리브르에 이른다. 


금속화폐를 은행권으로 대체했다는 사실의 의미를 이하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먼저, 은행권은 이를 소유한 개인이 요구하면,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일정량의 주화를 은행이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증권이다. 은행권의 발행자인 은행의 입장에서는, 경제주체들이 은행권을 보유하게 될 때, 은행에 금이나 은으로 상환을 요구하기 보다는 교환의 매개 혹은 채무나 세금 등의 지급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수익성 측면에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은행권 사용의 일반화는, 금과 은의 추가적인 유입없이도, 은행의 부채와 자산이 증가함을 의미하는데, 은행의 수익률을 결정하는 부채에 지급해야 할 이자율과 자산에서 받아야 할 이자율의 차이가 일정하다면, 은행권의 사용으로 재원 조달액을 나타내는 부채의 규모와 재원운용액을 나타내는 자산의 규모가 증가한다면, 은행의 수익은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의 시스템에서 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해 회사에 대출하고 회사는 은행이 대출해준 자금을 이용해 정부의 조세징수 업무 청부 계약을 체결하거나 지구상 도처에서 이뤄진 식민지개발과 식민지 무역 독점권을 정부로부터 구입하여 사업포트폴리오를 확대할 수 있었다. 회사의 사업포트폴리오 확대와 함께, 경제생활에서 은행권의 통용이 일반화되면서, 로가 설립한 민간 은행의 부채로서 법정화폐였던 주화의 일정량을 은행에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던 은행권이, 주화와 단절되어 사실상 법정 화폐로 작동했다.  


은행권이 사실상 법정화폐 역할을 맡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정치적 개입이 작용했다. 첫 번째 정치적 개입은 회계단위인 리브르로 표시된 주화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이었다. 1718년 12월 은행의 국유화 이후, 주화에 포함된 금과 은의 함유량에 변화가 없었지만, 회계단위로 표시된 금화나 은화의 가치는 1719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그 결과 회계단위로 표시된 금화의 가치는 36리브르에서 32리브르로, 은화의 가치는 6 리브르에서 5.6 리브르까지 하락했다. 반면, 주화의 가치하락에도 불구하고, 회계단위로 표시된 은행권은 변화없이 일정한 가치를 유지했다. 회계단위로 표시된 은행권의 가치는 일정하나 금화와 은화의 가치는 하락하는 상황에서, 세금징수 담당자들은 조세 명목으로 징수해 보유하던 금화와 은화에서 발생하는 평가손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이로 인해, 세금 징수 담당자는 세금징수에서 주화보다는 은행권을 더 선호하게 됐다. 이로써 세금징수와 관련해서, 은행권이 사실상 법정화폐로서 작동했다.


두 번째 정치적 개입은 정부 재정관련 업무 혹은 경제적 거래에서 은행권의 사용을 장려하거나 혹은 강제하는 조치들이다. 은행의 국유화 이후 1719년 동안 취해진 조치들을 살펴보자. 먼저 1718년 12월 27일부터는, 600 리브르를 초과하는 거래는 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은행의 지점이 있는 도시에서는 은행권으로, 만약 은행의 지점이 없는 도시에서는 금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로써, 법정화폐로서 은화의 지위는 600 리브르까지만 인정됐다. 은행권을 이용한 지급은 거부될 수 없었다.

그리고 1719년 7월 25일부터는 은행의 지점이 있는 도시에 거주하는 채권자가 금화 혹은 은화를 이용하는 지급을 거부하고 대신 은행권으로 지급을 요구할 수 있게 되는 조치가 시행됐다. 이로써, 금화와 은화는 법정 통화의 지위를 상실하게 됐다. 1719년 12월 1일부터 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미시시피 회사는 은행권으로만 거래하게 됐다. 즉, 회사가 징수하는 모든 세금을 포함하여, 회사가 수행해야 하는 모든 형태의 지급을 은행권으로 제한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로 인해, 회사는 조세 징수 청부 계약에 따라 정부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도 은행권으로 지급해야 했다.

1719년 12월 21일부터는, 10 리브르를 초과하는 지급에 은화 사용을 그리고 300 리브르를 초과하는 지급에 금화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 조치는 파리에서는 즉각 시행됐으나, 은행지점이 있는 도시에서는 1720년 3월 1일부터 그외 모든 지역에서는 4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러한 조치들의 결과로, 금화와 은화가 법정통화로서 통용되는 범위가 점점 축소됐고 반대로 은행권이 법정통화로 유통되는 범위는 확대됐다.


지금부터는 로의 시스템 붕괴과정을 분석해 보자. 일반적으로, 로의 시스템은 미시시피 회사 주식 가격에 발생한 거품의 붕괴로 무너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분석한 바에 다르면, 로의 경제개혁을 금융업자와 조세청부업자가 보유한 부의 구성을 금화와 은화 그리고 정부부채에서 로가 설립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과 은행이 발행한 은행권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500 리브로의 액면금액을 가진 회사 주식의 시장가격을 10,000 리브르 수준에서 유지하려는 투기적 거품 관련 에피소드 없이도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투기적 거품은 시스템 내로 도입됐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로의 체계에서 부의 구성재편이나 은행권 통용이 이자율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은행권 발행과 통용은 그 자체로 화폐량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실질 이자율을 낮추는 효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을 통해 실질 이자율을 낮추는 효과도 있었다. 즉,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은 통화량에 비례하여 증가했다. 따라서, 은행권 발행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해 배당수익율을 낮췄고, 이는 결과적으로 자산으로서 경쟁관계에 있던 정부 채권의 수익률 즉, 실질 이자율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로의 경제개혁에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해야 했던 것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이 국채를 대체하고 은행권이 주화를 대체하는 것의 이면인 실질 이자율를 낮추기 위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우연적 요소가 아니라 중요한 구성요소였다.


이 점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 먼저, 국채를 식민지 개발과 교역을 독점하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으로 바꾸려는 배경에는 정부의 부채 축소 외에도 연4% 이상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국채가 자산으로서 선호됨에 따라, 농업이나 상공업 부문에서는 발전에 필요한 규모의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인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배당수익과 자본이득 가능성을 가진 주식보유가 채권보유보다 선호되도록 함으로써 실질 이자율을 낮춰 민간 저축을 정부채권 구입이나 고리대금업이 아니라 농업이나 상공업 등 부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이동하게 해, 국가의 부를 증가할 뿐만 아니라, 생산자와 노동자의 삶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젼이 존재하고 있었다. 


기득권을 보유한 계급의 자산구성에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실질 이자율 하락이 필요했다. 실질 이자율을 직접 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산으로서 국채와 대체재 관계에 있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은 은행권의 양을 통해 조절할 수 있었다. 은행권 유통의 증가에서 기인하는 주가의 상승은 배당소득을 주식의 시장가격으로 나누어 구할 수 있는 배당수익율의 감소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주식보유에 따른 자본이득의 증가를 의미한다. 주식 보유와 대체관계에 있는 국채 보유에서 발생하는 실질이자율을 낮추기 위해서는 주가의 상승이 지속할 것으로 기대돼야 했다. 은행권의 발행과 유통으로 통화량이 증가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이 상승하고 향후에도 계속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면, 자본이득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들이 국채를 팔고 주식을 매입할 것이고 이로 인해 실질이자율도 하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의 시스템이 지향한 또 다른 목적인, 은행권이 주화를 대체하는 것의 배경에는, 주화에 비해 은행권의 가치가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공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은행권의 장점이 작용했다. 그리고 로의 이론에서는 통화량의 크기와 고용 혹은 경제활동 간에는 일정 비례관계가 있다고 주장된다. 그래서 은행권 발행을 통해 통화공급을 늘려 상공업자들과 농업 생산자들에게 필요한 자금이 공급되면, 물가안정이 유지되는 범위 내에서 고용, 생산량 그리고 화폐수요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완전히 사용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자원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됐다. 이처럼 은행권 발행을 통한 통화공급 확대로 인해 상기한 바처럼, 고용과 생산량에서 긍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이자율 하락이 개입한다. 


주식보유가 선호되는 자산보유 형태가 지속적으로 선호되기 위해서 주가는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고 이러한 높은 주가는 은행권의 대량 발행으로 유지됐다. 안정적인 교환의 매개면서 동시에 지불수단인 은행권의 도입과 함께, 고용과 투자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산보유 목적에 선호되는 자산으로서 미시시피 회사 주식이 국채를 대체할 수 있도록, 로는 은행권의 발행을 증가해 화폐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실질이자율을 2%까지 낮추려고 주가를 10,000리브르 수준에서 유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여러가지 조치들 취했다. 먼저, 1719년 가을까지, 회사는 주식을 담보로 낮은 이율에서 자금을 대출하는 사업을 운영했다. 또 다른 조치는 같은 해 10월에 취해진 5,000 리브르에 제시된 주식은 모두 매입할 것을 회사 재무 담당자들에게 요구한 명령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1719년 12월 말에, 회사가 주식을 매매할 수 있는 거래소를 설치한 것이다. 이 거래소에서는 회사가 매일 결정하는 가격에서 주식의 매매가 이뤄졌다. 이러한 조치들은 주식의 유동성을 높여, 개인들이 자산 보유의 형태를 선택할 때, 주식보유를 선호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산보유를 국채 중심에서 회사 주식 중심으로 전환하고 생산요소의 완전 고용뿐만 아니라 화폐가치의 안정성도 도모할 수 있는, 자신의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로는 주가와 은행권의 양을 동시에 관리해야 했다. 그런데, 주가의 지속적인 상승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통되는 은행권의 양 또한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은행권의 양이 증가하면, 은행이 응해야 할 태환 요구 금액은 은행이 예치받은 금화와 은화의 양을 초과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결국 태환 요구양 대비 은행이 보유한 주화 혹은 금과 은의 부족으로 이어져 은행권 유통 위축이나 은행 자체의 지속 가능성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적정 수준의 은행권 양을 유지하면서 주가의 상승 전망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상기한 시스템 내부의 긴장관계 외에도, 은행권이 금화나 은화로 태환될 수 있는 제도적 상황에서, 금화 혹은 은화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조치를 정부가 수차례 반복한 것은 외부적 긴장관계를 조성했다. 외부적 긴장관계는 주화의 해외유출과 관련 있다. 주화의 가치하락 조치로 인해, 예전에 주조된 금이나 은의 함량이 높은 주화가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금과 은의 함량이 낮은 새로운 주화로 교환되기 때문에, 예전에 주조된 주화의 소유자는 주화의 가치절하 조치가 적용되지 않는 외국에서, 자신이 보유한 주화에 포함된 금과 은의 함량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아 환전한 다음, 환전한 금액을 다시 정부조치로 인한 평가절하를 반영하는 외환시장을 거쳐, 원래 화폐단위로 환전하면 정부의 조치로 인한 손해는 면할 수 있다. 이처럼, 로의 시스템은 주화의 해외유출이라는 긴장관계 또한 내포하고 있었다.


은행권의 태환 가능성에서 유래하는, 시스템의 내부와 외부에 형성된  긴장관계는 로가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경제개혁에서 개혁의 대상이던 기득권 계층의 반발로 구체화된다. 


기득권 반발의 첫 번째 측면은 기득권 계층이 국가경제에서 담당하던 경제적 역할과 관련있다. 기득권 계층은 조세 청부업 또는 금융업을 영위했다. 그런데, 로의 개혁 프로그램이 실행됨에 따라, 미시시피 회사가 기득권 계층을 대신하여, 국가의 세금징수업무를 청부계약을 통해 수행하고 정부에 자금을 대여하게 되었다. 이로써, 미시시피 회사는 기득권 계층의 경제적 기반을 위협했다. 뿐만 아니라, 기득권 계층이 보유한 국채에 대한 실질 이자율이 4% 수준에서 로의 개혁 프로그램 시행으로 2% 수준까지 하락해, 국채보유에서 발생하는 기득권의 소득 흐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득권 계층이 축적한 국채의 일부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으로 대체됐다. 이에 따라, 기득권 계층은 정부에 대한 채권자뿐만 아니라 동시에 미시시피 회사의 주주이었다. 하지만, 기득권의 자산구성에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이 차지하는 금액에 비해 국채가 차지하는 금액이 여전히 더 컸다. 그래서, 비록 주가 상승에 따라 주식 보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자본이득의 크기가 커졌으나, 기득권 계층은, 실질이자율 하락으로 보유한 국채에서 발생하는 소득 흐름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질이자율 하락에 대한 기득권의 반발은 주가 10,000리브르 수준에서부터 자본이익 실현을 위해 보유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적극적으로 매도하는 기득권 계층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기득권의 자본이득 실현으로, 하락하는 주가를 일정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해, 로는 지정된 가격에서 주식을 매입하는 부서를 설치해 운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득권 계층의 반발의 또 다른 측면은 주화를 대체한 은행권과 관련 있다. 1720년 1월 시점에서 은행권 발행 잔액은 10억 리브르 정도였다. 1718년 12월말 은행권 발행 잔액이 4억 리브르 정도였으니,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은행권 발행잔액이 6억 리브르 정도 증가했다. 은행권 발행 증가는 은행이, 사업포트폴리오 확대를 위해 정부에 지급해야 할 자금을 미시시피 회사에 대여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부는 해외 식민지 개발과 무역에 독점적 권리 그리고 조폐창 운영권 혹은 각종 조세 징수업무 등을 회사에 매각하고 받은 대금을 부채 축소에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주식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미시시피 회사는 은행의 은행권 발권력을 이용해, 일정 가격에서 자기 주식을 매입했다. 이러한 두 가지 과정을 통해, 은행권은 대부분 기득권 계층의 소유가 되었다. 


은행권이 늘어남에 따라,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는 상승했는데 이는 동시에 보유 국채에 적용되는 실질이자율 하락을 의미했다. 따라서, 기득권 계층은 자본이익 실현을 위해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매각하거나 화폐주조 차익을 추구하기 위해 은행권의 태환을 요구할 수 있었다. 기득권 계층은 이로써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과 은행권 보유의 결과로 로의 시스템을 공격할 수단을 갖추게 됐다.


이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로는 1720년에 미시시피 주식회사의 주각 안정과 함께 은행 계좌를 이용한 결제시스템을 도입해 유동되는 은행권의 양을 축소하려고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득권의 반발을 나타내는 시스템의 내부 그리고 외부의 긴장관계로 인해, 로의 시스템은 지속되기 어려웠다. 1720년 로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은행권의 화폐지위 박탈과 그로 인한 은행의 폐지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리고 도래한 국채의 이자지급 기일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되어, 그의 시스템도 붕괴했다. 


로의 시스템이 붕괴되고 난 빈 자리는 다시 기득권 계층이 차지했다. 기득권 계층의 이기심으로 인해, 18세기 초 프랑스의 재정과 통화금융제도를 근대화하려던 로의 시도가 실패했고 체재 내 개혁의 가능성도 닫혀버렸다. 이는 결국 70여년 후 프랑스 대혁명 발발로 이어졌다.


by invisibleman 2017. 3. 11. 12:28

스미스나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을 언급하는 것이 경제학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경제학의 기원을,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발생한 중농주의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2004년에 발간된, 푸코(Michel Foucault)가 1977-78년에 꼴레쥐 드 프랑스에서 한 강의의 강의록인 “안전, 영토, 인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푸코에게 있어, 경제학의 탄생은, 그가 안정장치라고 부르는 권력 메커니즘과 인구 개념의 출현과 연결돼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푸코는 ‘지배’ (domination, tyranny)와는 구별되는 ‘통치’ (government), 그리고 담화, 텍스트, 제도 등으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가리키는 ‘사회적 장치’(social devices) 등의 개념을 동원하는 ‘권력 테크놀로지의 계보학’의 관점에서 법이나 규율과는 구분되는 ‘안전장치’가 형성되는 지점에서 경제학의 출현을 발견한다. 푸코의 이러한 관점은 고대 그리스의 ‘가정 관리’가 근대 국가의 기원과 함께 국가가 존속하도록 국가를 관리하는 기술 혹은 통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경제학으로 진화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관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으로 경제학이 출현했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분석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푸코의 권력메카니즘 혹은 권력관계의 분석은 법-규율-안정장치의 세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연대기를 내포하고 있다. 즉, 중세에서 18세기 이전까지 법을 중심에 두고 규율로 보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던 권력 메카니즘이 18세기 이후 중농주의와 함께 경제학이 출현하면서 안정장치 위주로 변형됐다는 것이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 절도하면 안 된다’와 같은 금기처럼, 법은 상상 작용을 통해 행할 수 있는 것과 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나누고,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을 행했을 경우 그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법이 상상적인 것 안에서 작동한다고 한다고 언급한다. 반면, 규율은,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법에 현실을 보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한다. 즉, 인간이 악의적이며, 나쁜 생각이나 나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명령과 의무 그리고 감시와 교정이 필요한데, 이러한 것들이 규율 메커니즘을 구성한다. 

상상을 기반으로 하는 법과 이를 보완하는 규율과는 달리, 푸코에 의하면, 안전장치는 현실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면, 절도나 살인은 더 이상 금기로 분류되는 대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즉 정치가 존재를 인정하고 영향을 미쳐야 하다는 의미에서, 안전장치에 주어지는 소재에 속하게 된다. 금기와 허용으로 규정하거나 감시와 교정 메커니즘을 작동하는 대신, 권력은 비용계산이나 통계작업을 거쳐 절도나 살인이 일어나는 빈도와 관련한 최적의 값과 용인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이를 반영하는 안정장치를 마련해 안정장치에 현실의 요소들의 조절을 맡겨 절도나 살인의 발생을 통제한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는 더 이상 신의 가르침이나 인간의 악한 천성으로 인해 필요해진 규칙을 인간의 행위에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작동 속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이처럼 안전장치에는 현실이 그 자체의 법칙, 원리, 메커니즘에 따라 발전하고 진행된다는 관점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안정장치라는 개념이 자유주의와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근대국가 그리고 안전장치를 배경으로 기원한 경제학이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장치와 관련하여 푸코가 언급하는 경제학의 기원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18세기 일반화된 궁핍 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안전 장치의 도입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 푸코는,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에서 국민들이 생존에 필요한 곡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곡물의 해외 유출을 금지해 국내에서 생산된 곡물이 낮은 가격으로 국민에게 공급되도록 하는 정부의 규율보다는 오히려, 곡물의 국내외 유통의 자유화라는 안전장치를 도입해,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의 자연적인 활동에 국민의 생존과 궁핍 문제의 해결을 맡기려 했던 중농주의의 관점에 주목한다. 

중농주의에 의하면, 곡물의 자유로운 유통은 모든 개인이 곡물을 원하는 만큼, 그리고 원하는 기간 동안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생산량이 풍족하면, 개인들은 곡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보다는 가격이 상승하길 기다리면서 축적할 수 있다. 그 결과, 풍년에도 곡물가격이 폭락하지 않고 일정수준에서 유지되어 곡물생산에서 수익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흉년으로 생산량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이 시장에 출하될 수 있어, 풍년이 든 해에 곡물을 비축했던 개인들은, 수입 곡물이 시장에 공급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오른 가격에 서둘러 비축했던 곡물을 시장에 내다 팔기 때문에 가격상승이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곡물의 자유로운 유통으로 안정적인 수익성 확보가 가능해져, 곡물생산에 보다 많은 사람들과 토지가 참여하게 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할 것이다.

중농주의 경제학자들은 풍년으로 인한 식량의 과잉과 그에 따른 가격하락 그리고 흉년으로. 인한 식량부족과 그에 따른 가격상승을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곡물의 시장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구변동을 반영하는 수요의 변화와 작황에 따른 공급량의 변화보다는 오히려 시장에 공급되는 곡물의 양에 영향을 미치는 토지의 질, 기후조건, 농업에 대한 인식 등을 포괄하는 생산부문과 국내시장뿐만 아니라 해외시장도 아우르는 유통부문을 분석의 중심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대상의 분석을 통해, 풍작에 따른 가격하락이나 흉작에 다른 가격상승을 억제하려는 법이나 규율 대신, 시장에 공급되는 곡물의 양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조절해 시장가격의 변동을 조금씩 상쇄하고, 제한하고, 결국에는 소멸시키는 안전장치를 주장했다. 법이나 규율을 대신해서 안정장치가 작동해 곡물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곡물생산량을 감안해 비축하거나 시장에 출하하거나 혹은 해외에서 수입하거나 해외로 수출하는 등 개인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려는 개별 곡물 생산자와 유통업자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농주의의 주장은 실증적인 묘사와 규범적 관점에 근거해 있다. 실증적으로는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사례를 이용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법이나 규율에 의한 전제군주의 통제가 철폐되어 곡물의 생산과 유통의 분야에서 생산자와 상인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불안정성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됐던 식량가격이 실제로는 농산물의 작황에 상관없이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국민들은 곡물의 수출입이 자유로운 시장을 통해 기아와 식량부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와 함께, 식량의 생산과 유통에서도 높은 수익이 실현됐다. 이러한 실증적 설명은 즉시 규범적인 관점으로 진화했다. 즉, 곡물의 유통을 자유화하는 정책은, 사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려는 곡물상인의 자연적인 행위를 통해, 국민을 배고픔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중농주의 분석에 내포된 실증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에서, 푸코는, 개인의 차원에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경제적 주체, homo oeconomicus를 발견했다. 중농주의 이론이 기술하는 경제주체들은 더 이상 사회구조에서 특정 지위를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구체적인 개인들이 아니다. 자유롭게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체들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근대 이전의 사회처럼 개인들에게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기능수행을 강제하는 사회구조가 소멸돼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추상적인 경제적 주체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의 결과로서 사회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사회구조의 형성이라는 결과를 감안하면, 사익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주체들의 행위가 전체적으로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시기에 출현한 통계학은 경제주체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이러한 규칙성을 발견하는데 기여했다. 푸코는 규칙성을 만들어 내는, 전체로서의 경제주체에 ‘인구’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그리고 권력 메카니즘으로서 안전장치는 인구가 만들어 내는 규칙성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장을 매개로 하는 안전장치에서 중추적인 역할은 경제주체인 인구가 맡게 된다. 안전장치를 구현하는 자유주의적 통치술과 관련하여, 경제학은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경제주체들로 이뤄진 인구가 경제생활에서 만들어내는 규칙성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역할을 했다. 

푸코가 18세기의 프랑스 중농주의에서 경제학의 기원을 발견한 것에 우리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이유는 중농주의가 사용한 자연질서의 개념이었다. 앞에서, 푸코가 언급한, 모든 경제주체들이 생산과 유통 부문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규칙성에서 자연질서를 형성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주체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규칙성을, 중농주의자들을 따라, 자연질서라고 부르자 마자, 그 규칙성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의 이해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중농주의의 득세와 함께, 경제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자연질서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경제학은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진 별개의 분과학문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분과학문으로서 경제학은 모든 경제주체들의 합의를 통해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로 구현되는 인간사회 형성에 관한 과학이라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정치가 존중해야 하는 법칙들과 요구사항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실제로, 중농주의는, ‘경제표’를 이용해 발견한 자연질서를 반영하는 농업왕국의 개념에 부합하는 정부형태(공화제보다는 군주제), 조세정책(지주가 부담하는 단일세) 등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했다. 

푸코는 권력 기술로서 안전장치가 처음 도입되는 과정에서 경제학의 기원을 발견한다. 안전장치는 그의 도입 이전에 권력 기술이었던 법 혹은 규율과는 달라서, 상상을 통해 도입되어 적용되는 금지를 중심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장치는 거주환경 같은 인위적인 것 뿐만 아니라 하천, 습지, 언덕 같은 자연적인 것을 아우르는 환경과 인구 사이에서 이뤄지는 자연적인 상호작용 메커니즘에 부착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자연의 통치를 어원으로 가지는 중농주의(physiocracy)가 경제학의 기원이 되고 권력기술로서 안전장치의 도입과정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제학이 안전장치를 제안하는 과학으로서 기원했다고 해서, 경제학이 정치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물리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자연으로서 경제를 전제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점에서 안전장치를 통해 작동하는 근대 통치기술에서 경제학의 기원을 찾은 푸코를 기독교 윤리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발견한 베버와 비교할 수 있다. 즉, 권력 기술의 진화를 분석하며, 18세기 프랑스에서 근대국가와 안전장치의 형성에 근거해 경제학의 기원을 찾은 푸코의 분석은 기독교 개신교의 윤리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의 동력을 발견한 베버를 연상시킨다. 베버가 종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17세기를 분석하면서, 금욕적 생활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소비되지 않은 소득의 투자를 내포하는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17세기의 자본주의 형성을 상징하는 이념형(Ideal type)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면, 경제학의 기원은 18세기를 분석하는 푸코가 채용한 이념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청교도 이념이 퇴조하고 공리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18세기 사회 및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경제주체 간의 도덕원리로서 새로운 이념형이 필요하게 됐는데, 이 시기 출현한 경제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17세기 이념형인 금욕적인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실천하던 상공인은 18세기에는 경제학자로 대체된다. 이 때 경제학자는 경제학이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진화하는 현상을 반영하듯이, 앞에서 언급한 루쏘나 케네 등을 포함하는 정치철학자 혹은 도덕철학자에 오히려 더 가깝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을 좀 더 분석해 보자. 앞서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경제학은 이전 시기에 발전한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발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과학혁명의 성과를 동원해, 개인의 행동과 개인의 행동들이 모여 형성된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들 속에서 경제학이 기원했다는 것이다. 우선, 궁국적인 원인과는 구별되는, 인간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원인들이 과학적 분석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실질적인 원인으로서 인간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열정을 포함하는 감각을 소재로 삼아 자신의 내면에서 이뤄지는 심리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심리분석을 통해 개인과 집단 행위 뿐만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행위들이 모여 이뤄지는 사회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행위의 실질적인 원인이 유쾌 혹은 고통의 축소로 간주될 수 있는 개인적 이익 추구로 해석됐다.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과학혁명의 영향은 결국 공리주의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공리주의는 정의나 진리같은 궁극적인 원인을 포기하고 역으로 개인의 이해관계라는 실질적인 원인으로 설명된 개인 행위가 모여, 구성된 공공선으로 대체하려는 지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슘페터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17세기 자연법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학의 기원과 관계 있는 것으로 언급했던 과학혁명과 자연법의 발전은 실상은 공리주의의 대두와 성장으로 대체할 수 있다.

경제학 기원의 기반이 되는 공리주의는 홉스와 로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홉스와 로크 이전 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공리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파스칼의 내기다. 파스칼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얀세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얀세니즘의 중요성은 캘비니즘과의 비교를 통해서 들어나는데, 캘비니즘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 이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인간의 구원에 전혀 소용없다. 현실에서 인간의 활동은 신이 미리 예정해 놓은 구원 여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얀세니즘은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락한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오히려 경제활동과 종교생활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충실한 삶을 사는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이러한 주장을 가진 얀세니즘을 배경으로 구성됐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걸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내기를 해야 한다. 만약 한 개인이 신의 존재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이 개인은 현세에서도 신의 구원을 받기에 적절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만약 신의 존재에 내기를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 그가 잃는 것은 유한한 그의 삶 동안 개인적 이익을 충분히 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개인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그의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면, 그의 삶은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에서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가 얻은 것은 사적 이익에 충실함 삶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신이 존재하는 경우, 신의 존재에 삶을 건 개인이 얻는 것과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개인이 잃는 것은 무한한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 개인이 내기에 따라 잃거나 얻는 것은 유한하다. 이로부터 파스칼은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신의 존재에 삶을 걸고 그에 따라 현실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드러난 공리주의에서 진화한, 18세기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은 세 가지 기본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경제학을 통해, 인간 행동의 동인으로서 화폐로 표현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일반화됐다. 이와 함께, 행동을 사회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도, 더 이상 자연법에 부합 여부가 아니라 공리주의가 적용됐다. 여기서 언급된 공리주의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형성되기 전의 것으로, 행동을 제약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자연법이나 신의 의지나 뜻과 같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기준에 따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요소는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공리주의가 개인 행동을 설명하는 관점이 되면서,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도 그에 따라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서 자연법을 대체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입법자와의 관계다. 18세기 경제학은 국가의 관리와 자연적인 조화와 질서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를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으로 나타나는 이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개인들의 행동과 인식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입법자라는 정치적 층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입법자는 개인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공리주의적 원칙을 국가의 조직과 운영에 충실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by invisibleman 2016. 5. 26. 22:27

1978년 콜레쥐 드 프랑스 강의록인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18세기의 프랑스 중농주의에서 경제학의 기원을 발견한 것에 주목하는 이유는 중농주의가 사용한 자연질서의 개념이었다. 앞에서, 푸코가 언급한, 모든 경제주체들이 생산과 유통 부문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규칙성에서 자연질서를 형성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주체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규칙성을, 중농주의자들을 따라, 자연질서라고 부르자 마자, 그 규칙성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의 이해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중농주의의 득세와 함께, 경제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자연질서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경제학은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진 별개의 분과학문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분과학문으로서 경제학은 모든 경제주체들의 합의를 통해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로 구현되는 인간사회 형성에 관한 과학이라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정치가 존중해야 하는 법칙들과 요구사항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실제로, 중농주의는, ‘경제표를 이용해 발견한 자연질서를 반영하는 농업왕국의 개념에 부합하는 정부형태(공화제보다는 군주제), 조세정책(지주가 부담하는 단일세) 등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했다.

경제학의 기원과 관과된 푸코의 언급은 막스 베버를 연상시킨다. 푸코는 정치 권력을 미시적으로 분석하면서 정치권력이 채택한 기술이나 전략을 대상으로 삼았다. , 푸코는 권력 테크놀로지의 진화를 분석하며, 18세기 프랑스에서 근대국가와 안전장치의 형성에 근거해 경제학의 기원을 찾았다. 이러한 푸코의 분석은 기독교 개신교의 윤리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의 동력을 발견한 베버를 연상시킨다. 베버가 종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17세기를 분석하면서, 금욕적 생활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소비되지 않은 소득의 투자를 내포하는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17세기의 자본주의 형성을 상징하는 이념형(Ideal type)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면, 경제학의 기원은 18세기를 분석하는 푸코가 채용한 이념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청교도 이념이 퇴조하고 공리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18세기 사회 및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경제주체 간의 도덕원리로서 새로운 이념형이 필요하게 됐는데, 이 시기 출현한 경제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17세기 이념형인 금욕적인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실천하던 상공인은 18세기에는 경제학자로 대체된다. 이 때 경제학자는 경제학이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진화하는 현상을 반영하듯이, 앞에서 언급한 루쏘나 케네 등을 포함하는 정치철학자 혹은 도덕철학자에 오히려 더 가깝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의 기반이 되는 공리주의 원시 형태는 파스칼의 내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스칼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얀세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얀세니즘의 중요성은 캘비니즘과의 비교를 통해서 들어나는데, 캘비니즘에 따르면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에 대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갈등ㄱ인간은 원죄 이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인간의 구원에 전혀 소용없다. 현실에서 인간의 활동은 신이 미리 예정해 놓은 구원 여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얀세니즘은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락한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오히려 경제활동과 종교생활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충실한 삶을 사는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이러한 주장을 가진 얀세니즘을 배경으로 구성됐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걸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내기를 해야 한다. 만약 한 개인이 신의 존재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이 개인은 현세에서도 신의 구원을 받기에 적절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만약 신의 존재에 내기를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 그가 잃는 것은 유한한 그의 삶 동안 개인적 이익을 충분히 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개인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그의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면, 그의 삶은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에서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가 얻은 것은 사적 이익에 충실함 삶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신이 존재하는 경우, 신의 존재에 삶을 건 개인이 얻는 것과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개인이 잃는 것은 무한한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 개인이 내기에 따라 잃거나 얻는 것은 유한하다. 이로부터 파스칼은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신의 존재에 삶을 걸고 그에 따라 현실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드러난 공리주의에서 진화한, 18세기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은 세 가지 기본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경제학을 통해, 인간 행동의 동인으로서 화폐로 표현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일반화됐다. 이와 함께, 행동을 사회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도, 더 이상 자연법에 부합 여부가 아니라 공리주의가 적용됐다. 여기서 언급된 공리주의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형성되기 전의 것으로, 행동을 제약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자연법이나 신의 의지나 뜻과 같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기준에 따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요소는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공리주의가 개인 행동을 설명하는 관점이 되면서,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도 그에 따라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서 자연법을 대체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입법자와의 관계다. 18세기 경제학은 국가의 관리와 자연적인 조화와 질서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를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으로 나타나는 이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개인들의 행동과 인식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입법자라는 정치적 층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입법자는 개인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공리주의적 원칙을 국가의 조직과 운영에 충실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by invisibleman 2016. 4. 14. 09:26



1990년대 이후 거침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시장’의 전면적이고 일방적인 지배도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화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거치며 흔들리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집중 조명된 사회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된 시장과 금융의 지배와 이에 무력한 정치의 반성을 촉구하는‘Occupy Wall Street’운동과 그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EU지역의 대중운동은 시장체제의 동요와 반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회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실질적 개혁은 미국과 EU지역 어디에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이와 관련해서, 미국과 유럽은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총기 사용이 초래하는 대량 살인, 사회적 약자를 향한 경찰의 물리적 폭력 행사, 기존의 정치지형에 변화를 초래하는 극우정치세력을 포함해서 좌우익의 새로운 정치세력의 부상, 근본주의와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세력의 대두 등을 겪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불평등 심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 경제 상황을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는 정치, 종교 그리고 의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위기’의 어원이 담고 있듯이, 진단과 그에 따라 안정과 갈등폭발, 구원과 지옥 혹은 삶과 죽음 같이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대안 사이에서 이뤄지는 선택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위기라고 규정되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반성은, 최근 피케티의 저작 "21세기 자본"이 초래한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과 광범위한 토론의 경우에서 잘 보았듯이, 분석 도구나 기법에 대한 논쟁 아니면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제기 등으로 소모되어, 위기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 구원 그리고 삶을 선택하도록 하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항상 혼란과 소요 등 값비싼 대가를 치루기 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이 책은 직접적으로 ‘시장’을 토대로 하는 경제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시장 혹은 경제현상에 대한 이해로 구성된 경제학에 대한 반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이 책은 경제현상을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의 역사인 경제학의 역사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현재 이뤄지고 있는 현재 경제 및 사회 체제에 대한 반성에 보다 분명한 방향성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경제학사적 분석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18세기를 배경으로 시장이 초래한 혼란과 시장에서 경제력을 집중한 일부 경제주체의 전제(tyranny)로부터 사회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진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으로서 경제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이 책은 현재 위기상황에 관한 분석이 초래하는 논쟁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장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사회적 전망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데 기여할여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학의 기원과 관련 있는 지적 노력이 프랑스에서 1776년에 완전히 중단된 지 13년만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근대 경제학의 기원이 되는 중농학파의 이론 탄생과 관련 있는 18세기의 경제학을 다루고 있다.  케네(François Quesnay, 1694 – 1774)의 경제표가 1756년에 그리고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국부론은 1776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케네가 아니라 스미스가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케네의 이론체계를 살펴보고, 어느 점에 그의 이론의 한계가 있으며, 스미스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경제적으로 표현되는 위기상황에 대한 정치적 해법이라는 관점에서, 케네와 스미스의 경제학이 모두 청치철학의 하위학문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에도 많은 비중이 주어질 것이다. 스미스의 경제학은 도덕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인 통치에 필요한 조언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케네의 경제학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지적 노력과 이를 바탕으로 군주를 설득해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려는 정치적 노력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강조될 것이다. 

이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18세기에 경제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8세기에 경제학이라고 하는 분과학문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기에 발생한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유산 때문이다. 과학혁명은 17~18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적 사고의 진화가 급격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뉴턴(Isaac Newton, 1643~1727),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를 거치며 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자연과학은 경험과 관찰에서 확인된 단순한 소수의 명제에서 출발해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어 논리적 정합성이 강조되는 체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발전은 근대 초기 인간사회의 문제 탐구에 관심을 두었던 일부 정치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 정치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사회의 탐구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따라서, 우주에서 자연이 유지해야 하는 혹은 물리학의 근본원칙의 적용을 받는 모든 개체가 준수해야 하는 조화로운 질서를 물리학이 보였듯이, 정치철학도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으로부터 도출되는 인간사회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리 표현하면, 만약 인간이,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개인의 활동을 사회 형성과 유지에 적합하도록 자연이 인간에 부과한 도덕 법칙을 인식하고 복종한다면, 자연은, 자연과학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조화로운 질서를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인간활동에서도 생산할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혁명이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가 17세기와 18세기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사용된 ‘시계’ 은유다. 이 시기 자연과학을 대표한 뉴턴의 과학이 시계 은유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규칙성, 질서, 조화 그리고 예측가능성을 상징하는 시계는 다수의 부분이 상호작용을 통해 전체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는데 필요한 실례로서 태양계와 인체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이용되었다. 물론,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실질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원인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시계 은유를 사용한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고 표시하는 목적을 수행하지만, 그 목적의 실현은 시계 내부에 있는 수 많은 스프링이나 톱니바퀴 등의 기계적인 운동과 연결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면, 개인의 보존과 인류의 번성 같은 최종 목적은 모든 개인들이 이를 의식하고 노력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이 자연법칙에 따라 그의 감정과 행동을 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시계 은유는 스미스 이전 경제학적 사고를 대변하는 중상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케네와 스미스가 경제학의 테두리 내로 가지고 온, 윤리적, 법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특정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해외 무역의 적절한 규제를 통해, 국가의 부를 증가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중상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산업으로 지출과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세금, 포상금 등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러한 정책제안도 태엽이나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져 조작될 수 있는 기계장치로서의 경제시스탬의 개념을 기반으로 도출되었다.

과학혁명과 함께, 18세기 경제학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자연법 사상의 발전이었다. 자연법은 이성이나 도덕감정과 같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정의 혹은 옳음에 대한 규칙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적 속성으로서 이성과 도덕감정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정의된 인류의 윤리적 이상을 표현한다. 자연법은 그 권위를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군주의 명령이나 의지 혹은 사회의 관습 같은 사회적 존재에서 찾지 않는다. 자연법은, 자명한 방법으로 드러나는 옳고 정당한 것에 관해 이성과 도덕감정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 혹은 인식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권위를 도출한다. 따라서, 자연법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관습법 혹은 정부의 입법과정을 거쳐 제정된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된다.

과학적 편향을 가진 중상주의자들이 활동한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경제이론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즉,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정의의 개념에서 도출된 공정가격의 개념을 사전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상업거래에서 정의가 담보돼야 한다는 중세의 법학자와 교부(scholars)의 생각을 근대 초기의 자연법 법학자와 도덕이론가들은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많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경쟁하는 자유로운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생산자가 부담해야 하는 생산비용과 시장에서 이뤄지는 판매자의 서비스에 대한 공정한 보상 그리고 구매자가 평가하는 해당 재화의 적절한 가치 등에 상응하는 공정가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경제현상에 적용된 자연법의 개념은 근대 경제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연법은 중농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간과 사회관계에 대한 경험에 이성을 적용해 발견해야 하는 정확한 규칙의 체계로, 그리고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는, ‘공정한 관객’이 느끼는 정의의 감정으로 진화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영향으로, 초기 경제학에는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과학적인 사회법칙의 개념이 섞여 있다. 이로 인해, 초기 경제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의 적용을 통해 경제부문에서 발견해야 하는 질서와, 인류의 번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에 의해 규정된 경제체계를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이 법칙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공존은 소위 ‘경제신학’을 창조했다. 즉, 18세기 경제학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발견한 자연의 규칙에 따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개인들이 교환을 통해 맺는 관계의 결과로 형성된 사회에서는, 경제학 내에서 개인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맡은, 개인들이 생산한 상품들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으로 귀결되는, 생산과 소비를 잇는 자연적인 순환을 한다는 결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하에서는, 경제학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케네와 스미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18세기 경제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경제학의 기원을 주장하는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보고 18세기 프랑스 중농주의를 경제학의 기원으로 주장한 푸코의 입장을 다룰 것이다. 이어 제2장에서는 ‘dérogence‘ 개념을 중심으로 중농주의 등장배경을 다루는데, 당시 위기상황에 처한 프랑스에 대해 중농주의의 두 창시자인 케네와 미라보가 처방한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소개함으로써 경제학이 기원한 시기 정치철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중농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가인 케네의 경제이론을 살펴보면서, 시간적으로 스미스를 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케네가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창시자의 지위를 갖지 못하는 이유를 그의 이론적 결함 속에서 찾아 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케네가 실패한 지점을 스미스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것이다. 제5장에서는 스미스의 사상 전반을 입법자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제1장에서 제5장까지 18세기 경제학을 시간 축을 따라 분석했다면 제6장부터 제8장까지는 경제학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세 가지 주제를 18세기 경제학의 내용을 주로 이용해 다루었다. 제6장에서는 경제학의 정의를, 제7장에서는 경제학자의 관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8장에서는 경제주체의 개념을 다루었다.

이 글은 프랑스 파리10대학 유학 시절이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두 교수 Jean Cartelier와 Carlo Benetti에게서 배운 바를 토대로(두 선생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오류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자의 책임이다.) 내가 스스로 기획한 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강의를 상상하며 쓰여졌다. 강의에 참석한 독자들에게 읽기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주를 최소한으로 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좀 더 학습을 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의 뒷부분에 참고문헌 목록을 추가했다.


by invisibleman 2016. 4. 4. 21:38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uart, 1712-1780)가 "Recherches des principes de l'économie politique"에서 주장하는 정치경제학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모든 사회성원을 포괄할 수 있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최근 유행하는 단어인 '덕후'를 이용해,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덕후'를 개별적인 생산자로 전화해 사회적 분업구조에 포괄시킬까?'라는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덕질'의 결과물을 상품화하는데 필요한 자본을 '덕후'가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통화금융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독립적인 개별 생산자가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통화금융제도로부터 공여받는 '자본'이기 때문이다. 

by invisibleman 2016. 2. 9. 19:17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샌더스와 힐러리는 월가로 대표되는 금융개혁을 전선 삼아 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제1야당이 총선을 앞두고 제시한 '더불어 성장론'에서는 금융개혁이 결여돼 있다. 

'경제민주화'를 위해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조세 재정 개혁은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의 결과에 국가가 경제주체 간의 형평성을 제고하기 위해 개입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을지로위원회를 통해 경제활동에도 직접 개입해 경제력 차이에 의한 경제주체 간의 차별성 축소 내지 해소에 노력해왔다. 

하지만, 경제활동이 개시되기 전, 경제활동의 조건 형성과 관련있는 금융부문 개혁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현재 금융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생성과 연관돼 있는, 금융기관의 신용공급이, 담보여력이나 신용도처럼 과거 경제활동의 결과를 근거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경제활동의 결과를 근거로 이뤄지는 신용공급이 바로 빈익빈 부익부의 원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성과를 근거로 하는 신용공급이 경제원칙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개혁의 대상 범위에서 벗어나 있다. 과거의 성공이 미래 시장에서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편의주의에 불과하다. 

샌더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원내 제1야당이 통화금융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을까?



by invisibleman 2016. 2. 6. 19:45

살인사건의 피해자를 대신해 그의 부모 혹은 다른 가족 아니면 친구나 애인이 대신에 국가가 사법제도를 통해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인자가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이 집행된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를 잃은 사람들은 그의 상실과 결여를 보상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사법제도의 존재이유가 실현되려면, 재판과정에서 살인자는 자신의 죄를 뒤돌아보고 교도소 수감기간 동안 뉘우치고 반성할 것이라는 가정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공허한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소설이다.

경제에서, 사회적이고 객관적 평가를 의미하는 가격이라는 것도, 법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사법제도와 유사하다.
공급자의 입장에서,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은, 자신이 시장에 가지고 온 제품에 대해 주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애착을 표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수요자의 입장에서도,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은, 자신이 시장에 찾은 그 재화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 평가와는 괴리가 있다.
재화에 대한 사회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인 가격을 공급자와 수요자의 주관적인 평가에 근접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상기한 소설 "공허한 십자가"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피해자 참가제도를 언급한다. 피해자 참가제도는 피해자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처험하는 상실감이 재판과정에서 표현될 수 있도록 피해자의 가족이 참여해 범죄자에게 구형하는 제도다. 살인사건의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부모가 출석해, 살해당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언급하며, 그의 죽음으로 그들이 얼마나 큰 슬픔을 느끼고 있는지 그들은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설명한다면, 살해당한 사람을 사랑하던 사람이 출석해 그의 사랑이 대상을 잃고 그가 어떤 상실감을 느끼고 얼마나 방황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면, 살인자는 그의 행위를 적어도 한 번 돌아다보진 않을까? 그렇다면, 재판 끝에 판사가 선고한 형량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후회나 회한 혹은 반성의 감정도 조금 더 늘어나진 않을까?

시장가격에 대해서도 유사한 해결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공급자와 수요자가 가격신호에 대해 공급량과 수요량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만 자신을 표현하지 말고 공급자와 수요자가 공급과 수요에 대한 의사결정 단계에서부터 직접 소통한다면 해당 재화에 대해 공급자와 수요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애착이 공유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이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시장경제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의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by invisibleman 2016. 1. 17. 00:13
오늘 아침에 한 정신장애인이 자신의 발병을 자기 안의 사랑이 죽었다는 표현으로 얘기하는 인터뷰 기사(http://beminor.com/m/content/view.html?section=1&category=3&no=9075#sthash.msgekBKW.5uIug7sl.dpbs)를 읽었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원래 인간은 남남, 여여 혹은 남여의 형태로 두 가지 존재가 결합된 상태로 창조됐었는데, 신이 이것을 분리해 버렸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트라우마를 초래한 대상이나 사건으로 끝없이 회귀하는, 죽음충동이 지배하는 강박증자와 쾌락원칙에 충실하게 트라우마와 관련된 상황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히스테리환자가 그것이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카프카의 어머니는 강박증자다. 죽어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떠나지 못한다. 그로 인해 카프카의 아버지와 카프카를 버리고 떠난다. 카프카의 아버지와 카프카 역시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나카타 노인은 히스테리 증자라고 할 수 있다. 이차대전 일본이 패망을 앞둔 시기, 미군의 공습을 피해 시골로 전학을 간 학교에서 담임 여선생의 인솔로 버섯을 따러 간 숲 속에서 담임 여선생의 생리혈이 묻은 손수건을 주워 담임선생에게 크게 혼이 난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나카타는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프로디테를 성가시게 한 죄로 여신의 분노를 샀다고 전해지는 그리스 신화 속 어느 불쌍한 사냥꾼을 연상시킨다. 그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은 나카타는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 않고 직업도 없이 보조금만으로 살며 가끔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주는 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다던 중, 자신과 소통하던 고양이들을 구하기 위해, 고양이를 학살하던, 조니 워커로 변장한 카프카의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그는 히스테리 증상을 극복한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의 사건들도 해결을 향해 진행된다.

엄머를 찾기 위해 가출을 한 카프카는 옛사랑의 추억이 보존되고 있는 어느 지방의 한 도서관을 관리하고 있는 사에키를 만나고 자신의 엄마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에서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어릴 적 모습을 발견한 엄마와 관계를 가진다. 오이디푸스에서 처럼, 관계 후에 사에키는 카프카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식하게 되고 스스로가 방기했던 엄마의 역할을 스스로 떠 안게 된다.

이로써, 작품을 체우던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은 사라지고 소년 카프카는 홀로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by invisibleman 2015. 11. 26. 10:59
| 1 2 3 4 5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