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Economics”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 “Οἰκονομικός(oeconomicus)”에서 유래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이 글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Οἰκονομικός가 사용된 사례로서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분석해서 발견한 고대 그리스에서의 경제학의 의미를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리오넬 로빈스(Lionel Robbins)이 내린 경제학의 정의와 비교하고자 한다.
상기한 고대 그리스어 단어는 집을 의미하는 ‘oeco’와 법이나 지배를 의미하는 ‘nomicus’가 결합해 이뤄져 가정 관리를 의미하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하지만, 크세노폰(Xenophon)이 이 단어를 자신의 저작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후, oeconomicus는 ‘가정관리에 대한 실제적인 지혜의 체계’를 지칭하게 됐다. 그리고 이 단어가 적용범위를 확대해, 도시국가의 관리를 의미하는 사례도 일반적이게 되었다.
경제학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크세노폰의 저작은 소크라테스가 친구의 아들인 크리토불루스(Critobulus)와 대화하는 부분과 당시 성공한 농업 경영자이며 국정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범 시민으로 알려진 이쇼마추스(Ischomachus)와 대화하는 부분 등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크리토불루스와의 대화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 단어 'Οἰκονομικός'의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Οἰκονομικός'는 부를 증가하는 방법에 지식적 체계이고, 부는 삶에 유용한 것으로 사람들이 사용할 줄 아는, 가계 구성원이 소유한 부동산 및 동산, 기술, 능력 그리고 사회적 관계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가계의 물리적 생존과 정치적 활동 혹은 소크라테스와 교류하기에 충분한 잉여를 얻을 수 있는 업종으로서 농업을 크리스토불루스에게 추천한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농업은 부수적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시민을 육체적으로 단련하여 전장에서 병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이점도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크리토불루스의 대화는 소크라테스와 이쇼마추스의 대화로 이어진다. 즉, 농업에 종사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 이유를 묻는 크리스토불루스에게, 소크라테스는, 그 이전에 이쇼마추스와 나눈 대화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답변한다.
당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가정 관리의 모범적인 사례의 주인공으로서, 성공적인 가정 관리에 관한 실제적인 지혜를 소유했다고 알려진 농부 이쇼마추스와의 대화 부분은 부인의 교육, 그를 대신하여 농업 경영을 담당한 관리인 혹은 노예의 교육, 그리고 농업 기술에서, 이쇼마추스의 경험을 전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농업 생산자 간에 존재하는 빈부격차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쇼마추스는 농업에 대한 지식의 결핍이나 부족이 아니라 농업에 대한 마음가짐과 집중력의 차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다름 아닌 농업 경영과정에서 생산력이 증가된 농지를 매각함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수익에 대한 열망이라고 해석한다.
크세노폰의 'Οἰκονομικός'에서 이쇼마추스와의 대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의 교육이고 그 다음은 농장 관리인의 교육이고 물질적 부의 획득과 관련 있는 농업 경작방법에 대한 대화가 가장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가정관리의 대상을 중요도로 구분할 때,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하고 살아 있는 것 중에서는 노예보다는 자유민이 더 중요하다는, 저서 'Οἰκονομικός'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도 공유된다. 그리하여 'Οἰκονομικός'에 관한 그의 견해가 잘 드러난 정치학 제1권 역시 주인과 물적 재산보다는 주인과 노예, 남편과 부인 그리고 아버지와 아이 등 인간 간의 관계에 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하지만, 남편과 부인,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 내용은 크세노폰의 'Οἰκονομικός'에서 기술된 바와는 구별된다.
소크라테스가 이쇼마추스와 대화하는 부분은, 화자로서 소크라테스가 전달한다는 형식으로 인해, 'Οἰκονομικός'에서 부인과 관리인의 교육과 관련하여 이쇼마추스가 주장한 바가 여성과 노예 교육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일정 정도 부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쇼마추스는 자신의 부인이 가장인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혼자서 노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며 가정 관리를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예들도 가정과 농장에서 주인인 자신을 대신할 수 있도록, 주인과 동등한 정도로 주인의 일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대리인으로서 주인과 주인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 윤리적 자세를 교육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을 대신할 수 있도록 아내와 노예를 교육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 그리고 주인과 노예는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영혼을 소유하고 있지만, 서로 다른 덕을 소유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아내와 노예가 집과 농장에서 주인이 부재한 경우에도 주인을 대신해 가정 관리를 실행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다는 이쇼마추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호보전적인 성격을 가지는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처럼 가정에서 차지하는 지위의 차이에 상응하는 개인 간 차이를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적 재산을 획득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크세노폰의 'Οἰκονομικός'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차이를 보인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농업 기술이 보편적으로 보급되어 개인에 따른 차별 없이 일정 수준의 기술이 적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성공한 농업 가구와 실패한 농업 가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는 화폐적 이익을 추구하는 태도의 유무 혹은 차이로 해석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양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는, 화폐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부자연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가정 관리의 행동은 농업이나 축산업처럼 가족, 공동체, 국가의 삶에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들이 사용될 수 있도록 한정된 양을 공급하거나 비축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관리에 대한 지식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좀 더 진화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학에서 ‘Οἰκονομικός’를 다루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Οἰκονομικός(oeconomicus)’에 포함된 ‘nomos’는 규범을 의미하는데, 규범에는 법이나 지배뿐만 아니라 용기나 절제 등을 포함하는 모든 덕도 포함된다. 이처럼 덕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사람을 올바른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포함된 ‘nomos’의 어원으로 인해, ‘Οἰκονομικός’는 윤리학에서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정관리 행위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 행위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통해, 행복의 개념을 인간 사회에 대한 연구 속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근대 경제학이나 공리주의와는 달리, 행복이 쾌락 추구가 아니라 정의와 같은 미덕에 적합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 있었다. 따라서 시장에서의 거래 혹은 국가의 이름으로 획득한 부를 재분배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으로 해석되어 불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고 따라서 국가 또한 자연적 산물이라고 전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국가를 구성하는 제도 중 하나인 법과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했다. 그의 체계에서 법과 정의가 가지는 관계에 의하면, 정의는 합법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장의 교환과 국가의 분배 등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정의를 평균의 개념을 사용해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 방법은 정의에 부합하는 교환과 분배를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계측단위를 사용해 측정할 수 있는 크기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합법적인 것으로서 규정된 정의와 국가의 보편적 계측단위로 표현될 수 있는 정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의 충족을 위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정의를 그들이 생산했거나 소유한 재화의 가치와 그것과 교환되는 타인이 생산한 재화의 가치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산술적 비례로서 규정한다. 이는 교환관계에서 한 사람이 손실을 보았다면, 이를 보상하는 방법은 거래 상대방이 획득한 이익을 차감하는 것이라는 의미다. 산술적 비례의 회복을 통해, 교환관계는 정의에 부합하는 사회관계로 환원될 수 있다.
이러한 조정적 정의 외에도 정부의 보조금처럼 ‘동등한 사람에게는 동등한 가치의 몫이 그리고 동등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동등하지 않은 가치의 몫이 배분’되는 분배적 정의는 기하평균으로 표현됐다.
조정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에서 사용되는 가치의 개념은 정치적 공동체를 전제했던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유일한 교환의 매개이며 가치의 척도인,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통용되는 화폐를 사용해 표현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체계 내에서, 교환관계와 분배관계가 정의의 개념을 기반으로 가지고 규범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경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종속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또한, 대중들이 미덕 혹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양육과 직업뿐만 아니라 생활전체를 법률로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서 필요한 법을 제정하기 위한 입법능력은 정치학의 한 분야로 간주했기 때문에 경제학은 정치학의 한 부분으로서 진화했다.
“Economics is the science which studies human behavior as a relationship between ends and scarce means which have alternative uses”라는 로빈스의 경제학 정의는 희소한 자원과 목적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한다. 자원과 목적의 관계는 합리성 가정 하에서 예산제약하 목적함수의 극대화 문제로 전환된다. 자원과 목적의 관계에 집중하지만, 로빈스가 정의한 경제학은 인간이 희소한 자원을 가지고 추구하는 목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오늘날 경제학의 어원인 'Οἰκονομικός'가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의미를 보면, 'Οἰκονομικός'는 가정이 보유한 자원과 가정에서 생산된 생산물로 추구하는 목적 간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목적에 많은 관심을 둔다. 고대 그리스에서 가정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근대 경제학에서처럼 개인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화가 희소하기 때문은 아니다. 가정이 관리 되어야 하는 이유는 가정에서 생산된 부가 단순히 가정을 구성하는 가장과 아내, 자식, 관리인 그리고 노예 등의 물리적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이 시민으로서 국가 운영에 참여해야 하는 권리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질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교환과 부와 명예의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과정도 시민들이 가정을 유지하고 국가의 운영에 참여하려는 가정관리에 포함되는 영역이다. 교환의 상대나 자신 이외의 국가 구성원들의 물리적 생존과 정치적 권리와 의무 이행에 필요한 물적 기반을 파괴하지 않도록, 교환과정이나 분배과정에서 자신의 몫을 부당하게 더 많이 갖지 않도록 산술평균이나 기하평균에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을 자발적으로 멈추어야 한다. 산술평균 혹은 기하평균으로 규정된 정의의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by invisibleman 2017. 7. 11. 22:09

1978년 콜레쥐 드 프랑스 강의록인 "안전, 영토, 인구"에서 푸코가 18세기의 프랑스 중농주의에서 경제학의 기원을 발견한 것에 주목하는 이유는 중농주의가 사용한 자연질서의 개념이었다. 앞에서, 푸코가 언급한, 모든 경제주체들이 생산과 유통 부문에서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규칙성에서 자연질서를 형성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주체들이 전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규칙성을, 중농주의자들을 따라, 자연질서라고 부르자 마자, 그 규칙성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의 이해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중농주의의 득세와 함께, 경제학의 연구대상으로서 자연질서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경제학은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가진 별개의 분과학문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분과학문으로서 경제학은 모든 경제주체들의 합의를 통해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로 구현되는 인간사회 형성에 관한 과학이라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정치가 존중해야 하는 법칙들과 요구사항들을 생산하게 되었다. 실제로, 중농주의는, ‘경제표를 이용해 발견한 자연질서를 반영하는 농업왕국의 개념에 부합하는 정부형태(공화제보다는 군주제), 조세정책(지주가 부담하는 단일세) 등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했다.

경제학의 기원과 관과된 푸코의 언급은 막스 베버를 연상시킨다. 푸코는 정치 권력을 미시적으로 분석하면서 정치권력이 채택한 기술이나 전략을 대상으로 삼았다. , 푸코는 권력 테크놀로지의 진화를 분석하며, 18세기 프랑스에서 근대국가와 안전장치의 형성에 근거해 경제학의 기원을 찾았다. 이러한 푸코의 분석은 기독교 개신교의 윤리에서 자본주의의 출현의 동력을 발견한 베버를 연상시킨다. 베버가 종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17세기를 분석하면서, 금욕적 생활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소비되지 않은 소득의 투자를 내포하는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17세기의 자본주의 형성을 상징하는 이념형(Ideal type)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면, 경제학의 기원은 18세기를 분석하는 푸코가 채용한 이념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청교도 이념이 퇴조하고 공리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한 18세기 사회 및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경제주체 간의 도덕원리로서 새로운 이념형이 필요하게 됐는데, 이 시기 출현한 경제학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17세기 이념형인 금욕적인 기독교 개신교 윤리를 실천하던 상공인은 18세기에는 경제학자로 대체된다. 이 때 경제학자는 경제학이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에서 진화하는 현상을 반영하듯이, 앞에서 언급한 루쏘나 케네 등을 포함하는 정치철학자 혹은 도덕철학자에 오히려 더 가깝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의 기반이 되는 공리주의 원시 형태는 파스칼의 내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파스칼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얀세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얀세니즘의 중요성은 캘비니즘과의 비교를 통해서 들어나는데, 캘비니즘에 따르면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에 대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진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갈등ㄱ인간은 원죄 이후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인간의 구원에 전혀 소용없다. 현실에서 인간의 활동은 신이 미리 예정해 놓은 구원 여부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반면 얀세니즘은 원죄 이후 인간의 타락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락한 상황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에게 오히려 경제활동과 종교생활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동기를 제공한다고 하면서 충실한 삶을 사는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파스칼의 내기는 이러한 주장을 가진 얀세니즘을 배경으로 구성됐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걸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내기를 해야 한다. 만약 한 개인이 신의 존재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면, 이 개인은 현세에서도 신의 구원을 받기에 적절한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신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만약 신의 존재에 내기를 걸었는데 사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면, 그가 잃는 것은 유한한 그의 삶 동안 개인적 이익을 충분히 추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개인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그의 삶을 걸었는데 사후 신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되었다면, 그의 삶은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에 삶을 걸었는데 사후에서도 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면, 그가 얻은 것은 사적 이익에 충실함 삶이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신이 존재하는 경우, 신의 존재에 삶을 건 개인이 얻는 것과 신의 존재를 부정했던 개인이 잃는 것은 무한한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아서 개인이 내기에 따라 잃거나 얻는 것은 유한하다. 이로부터 파스칼은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신의 존재에 삶을 걸고 그에 따라 현실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내기에서 드러난 공리주의에서 진화한, 18세기 이념형으로서 경제학은 세 가지 기본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경제학을 통해, 인간 행동의 동인으로서 화폐로 표현되는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일반화됐다. 이와 함께, 행동을 사회적으로 평가함에 있어서도, 더 이상 자연법에 부합 여부가 아니라 공리주의가 적용됐다. 여기서 언급된 공리주의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형성되기 전의 것으로, 행동을 제약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자연법이나 신의 의지나 뜻과 같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기준에 따르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요소는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공리주의가 개인 행동을 설명하는 관점이 되면서, 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도 그에 따라 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이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서 자연법을 대체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입법자와의 관계다. 18세기 경제학은 국가의 관리와 자연적인 조화와 질서 개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를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으로 나타나는 이기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개인들의 행동과 인식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입법자라는 정치적 층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입법자는 개인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공리주의적 원칙을 국가의 조직과 운영에 충실하게 적용한다는 의미에서 신학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by invisibleman 2016. 4. 14. 09:26



1990년대 이후 거침없이 지속될 것 같았던 ‘시장’의 전면적이고 일방적인 지배도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의 부실화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를 거치며 흔들리고 있다. 특히,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집중 조명된 사회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된 시장과 금융의 지배와 이에 무력한 정치의 반성을 촉구하는‘Occupy Wall Street’운동과 그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EU지역의 대중운동은 시장체제의 동요와 반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회불평등을 시정하려는 실질적 개혁은 미국과 EU지역 어디에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이와 관련해서, 미국과 유럽은 시민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총기 사용이 초래하는 대량 살인, 사회적 약자를 향한 경찰의 물리적 폭력 행사, 기존의 정치지형에 변화를 초래하는 극우정치세력을 포함해서 좌우익의 새로운 정치세력의 부상, 근본주의와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세력의 대두 등을 겪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불평등 심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 경제 상황을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는 정치, 종교 그리고 의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위기’의 어원이 담고 있듯이, 진단과 그에 따라 안정과 갈등폭발, 구원과 지옥 혹은 삶과 죽음 같이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는 대안 사이에서 이뤄지는 선택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재 위기라고 규정되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반성은, 최근 피케티의 저작 "21세기 자본"이 초래한 폭발적인 대중의 관심과 광범위한 토론의 경우에서 잘 보았듯이, 분석 도구나 기법에 대한 논쟁 아니면 대상이 되는 현실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제기 등으로 소모되어, 위기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 구원 그리고 삶을 선택하도록 하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항상 혼란과 소요 등 값비싼 대가를 치루기 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해, 이 책은 직접적으로 ‘시장’을 토대로 하는 경제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시장 혹은 경제현상에 대한 이해로 구성된 경제학에 대한 반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이 책은 경제현상을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의 역사인 경제학의 역사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현재 이뤄지고 있는 현재 경제 및 사회 체제에 대한 반성에 보다 분명한 방향성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경제학사적 분석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18세기를 배경으로 시장이 초래한 혼란과 시장에서 경제력을 집중한 일부 경제주체의 전제(tyranny)로부터 사회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진 정치철학의 하위학문으로서 경제학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함으로써, 이 책은 현재 위기상황에 관한 분석이 초래하는 논쟁을 구성하는 다양한 주장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정치사회적 전망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데 기여할여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경제학의 기원과 관련 있는 지적 노력이 프랑스에서 1776년에 완전히 중단된 지 13년만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근대 경제학의 기원이 되는 중농학파의 이론 탄생과 관련 있는 18세기의 경제학을 다루고 있다.  케네(François Quesnay, 1694 – 1774)의 경제표가 1756년에 그리고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국부론은 1776년에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케네가 아니라 스미스가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케네의 이론체계를 살펴보고, 어느 점에 그의 이론의 한계가 있으며, 스미스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경제적으로 표현되는 위기상황에 대한 정치적 해법이라는 관점에서, 케네와 스미스의 경제학이 모두 청치철학의 하위학문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술에도 많은 비중이 주어질 것이다. 스미스의 경제학은 도덕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합리적인 통치에 필요한 조언을 제공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케네의 경제학은 18세기 프랑스의 경제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는 지적 노력과 이를 바탕으로 군주를 설득해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려는 정치적 노력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 강조될 것이다. 

이 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18세기에 경제학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18세기에 경제학이라고 하는 분과학문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 시기에 발생한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유산 때문이다. 과학혁명은 17~18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적 사고의 진화가 급격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뉴턴(Isaac Newton, 1643~1727),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를 거치며 수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자연과학은 경험과 관찰에서 확인된 단순한 소수의 명제에서 출발해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어 논리적 정합성이 강조되는 체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발전은 근대 초기 인간사회의 문제 탐구에 관심을 두었던 일부 정치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 정치철학자들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인간사회의 탐구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다. 따라서, 우주에서 자연이 유지해야 하는 혹은 물리학의 근본원칙의 적용을 받는 모든 개체가 준수해야 하는 조화로운 질서를 물리학이 보였듯이, 정치철학도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으로부터 도출되는 인간사회의 질서를 발견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리 표현하면, 만약 인간이,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개인의 활동을 사회 형성과 유지에 적합하도록 자연이 인간에 부과한 도덕 법칙을 인식하고 복종한다면, 자연은, 자연과학이 발견한 것과 유사한 조화로운 질서를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인간활동에서도 생산할 것이라고 믿었다.

과학혁명이 근대 경제학적 사고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가 17세기와 18세기 초반에 걸쳐 활발하게 사용된 ‘시계’ 은유다. 이 시기 자연과학을 대표한 뉴턴의 과학이 시계 은유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규칙성, 질서, 조화 그리고 예측가능성을 상징하는 시계는 다수의 부분이 상호작용을 통해 전체를 구성하는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는데 필요한 실례로서 태양계와 인체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이용되었다. 물론,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실질적인 원인과 궁극적인 원인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시계 은유를 사용한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고 표시하는 목적을 수행하지만, 그 목적의 실현은 시계 내부에 있는 수 많은 스프링이나 톱니바퀴 등의 기계적인 운동과 연결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인간사회에 적용하면, 개인의 보존과 인류의 번성 같은 최종 목적은 모든 개인들이 이를 의식하고 노력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이 자연법칙에 따라 그의 감정과 행동을 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시계 은유는 스미스 이전 경제학적 사고를 대변하는 중상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케네와 스미스가 경제학의 테두리 내로 가지고 온, 윤리적, 법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특정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해외 무역의 적절한 규제를 통해, 국가의 부를 증가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중상주의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산업으로 지출과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세금, 포상금 등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러한 정책제안도 태엽이나 톱니바퀴 등으로 이루어져 조작될 수 있는 기계장치로서의 경제시스탬의 개념을 기반으로 도출되었다.

과학혁명과 함께, 18세기 경제학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자연법 사상의 발전이었다. 자연법은 이성이나 도덕감정과 같은,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정의 혹은 옳음에 대한 규칙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연적 속성으로서 이성과 도덕감정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정의된 인류의 윤리적 이상을 표현한다. 자연법은 그 권위를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나 군주의 명령이나 의지 혹은 사회의 관습 같은 사회적 존재에서 찾지 않는다. 자연법은, 자명한 방법으로 드러나는 옳고 정당한 것에 관해 이성과 도덕감정을 가진 존재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지식 혹은 인식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 권위를 도출한다. 따라서, 자연법은 통치자의 명령이나 관습법 혹은 정부의 입법과정을 거쳐 제정된 실정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된다.

과학적 편향을 가진 중상주의자들이 활동한 시기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경제이론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즉, 거래 당사자 모두에게 정의의 개념에서 도출된 공정가격의 개념을 사전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상업거래에서 정의가 담보돼야 한다는 중세의 법학자와 교부(scholars)의 생각을 근대 초기의 자연법 법학자와 도덕이론가들은 거부했다. 대신, 이들은 많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경쟁하는 자유로운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생산자가 부담해야 하는 생산비용과 시장에서 이뤄지는 판매자의 서비스에 대한 공정한 보상 그리고 구매자가 평가하는 해당 재화의 적절한 가치 등에 상응하는 공정가격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경제현상에 적용된 자연법의 개념은 근대 경제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자연법은 중농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인간과 사회관계에 대한 경험에 이성을 적용해 발견해야 하는 정확한 규칙의 체계로, 그리고 아담 스미스에게 있어서는, ‘공정한 관객’이 느끼는 정의의 감정으로 진화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과학혁명과 자연법 사상의 영향으로, 초기 경제학에는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자연법이라는 개념과 과학적인 사회법칙의 개념이 섞여 있다. 이로 인해, 초기 경제학에서 자연과학적 방법의 적용을 통해 경제부문에서 발견해야 하는 질서와, 인류의 번영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에 의해 규정된 경제체계를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경제 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이 법칙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의 공존은 소위 ‘경제신학’을 창조했다. 즉, 18세기 경제학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발견한 자연의 규칙에 따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 개인들이 교환을 통해 맺는 관계의 결과로 형성된 사회에서는, 경제학 내에서 개인들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맡은, 개인들이 생산한 상품들이 인류의 보존과 번영으로 귀결되는, 생산과 소비를 잇는 자연적인 순환을 한다는 결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하에서는, 경제학의 기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케네와 스미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18세기 경제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1장에서는 경제학의 기원을 주장하는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보고 18세기 프랑스 중농주의를 경제학의 기원으로 주장한 푸코의 입장을 다룰 것이다. 이어 제2장에서는 ‘dérogence‘ 개념을 중심으로 중농주의 등장배경을 다루는데, 당시 위기상황에 처한 프랑스에 대해 중농주의의 두 창시자인 케네와 미라보가 처방한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을 소개함으로써 경제학이 기원한 시기 정치철학과 경제학의 관계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중농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가인 케네의 경제이론을 살펴보면서, 시간적으로 스미스를 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케네가 일반적으로 경제학의 창시자의 지위를 갖지 못하는 이유를 그의 이론적 결함 속에서 찾아 볼 것이다. 제4장에서는 케네가 실패한 지점을 스미스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의미를 생각해 볼 것이다. 제5장에서는 스미스의 사상 전반을 입법자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제1장에서 제5장까지 18세기 경제학을 시간 축을 따라 분석했다면 제6장부터 제8장까지는 경제학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세 가지 주제를 18세기 경제학의 내용을 주로 이용해 다루었다. 제6장에서는 경제학의 정의를, 제7장에서는 경제학자의 관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8장에서는 경제주체의 개념을 다루었다.

이 글은 프랑스 파리10대학 유학 시절이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두 교수 Jean Cartelier와 Carlo Benetti에게서 배운 바를 토대로(두 선생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 오류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자의 책임이다.) 내가 스스로 기획한 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강의를 상상하며 쓰여졌다. 강의에 참석한 독자들에게 읽기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주를 최소한으로 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다룬 주제에 대해 좀 더 학습을 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의 뒷부분에 참고문헌 목록을 추가했다.


by invisibleman 2016. 4. 4. 21:38

코맥 매카시의 소설 "국경을 넘어" 중에는 "하느님이 없으면 목격자도 있을 수 없다는 거야. 세상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저 세상에 대한 각 개인의 의견이 있을 뿐이지" 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이 가지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주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다. 즉, "개인의 단편적 체험이 세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하느님이 그리고 동시에 목격자가 있어야 한다". 혹은 "개인이 모여 사회가 구성되려면 하느님과 그에 대한 목격자가 동시에 전제돼 있어야 한다".

상호작용을 통해 규정되는 개별 주체를 조직화 혹은 사회화하려면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이 판단을 토대로 이론화하는 존재도 전제돼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이론의 구조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자의 위치를 반영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세상의 자리에 공감 메카니즘을 그리고 하느님의 자리에 공정한 관객을 대입하면 된다.

개인들 사이에서 공감 메카니즘을 통해 형성되는 열정의 완화, 개인적 이익과 선호의 형성, 혹은 개인적 생산물의 교환비율이 사회적 도덕체계 혹은 가치체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관객 혹은 일반적 등가물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러한 서술은 도덕감정론에서 국부론으로 이어지는 아담 스미스의 사회형성에 대한 주장에 대한 요약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회형성에 대한 주장은 프린스에게 혹은 법을 제정하는 정치가에게 자문의 역할을 하는 정치경제학자의 과학인 '입법자의 과학'의 기초가 된다.

by invisibleman 2015. 7. 29. 10:58
18세기 프랑스에서는 디드로를 중심으로 계몽사상의 성과를 담은 백과전서가 발행됐다. 이 백과전서에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이 정치경제학 항목을 작성한 사람은 장-자크 루쏘다. (1755년 Discourse on political economy). 루쏘의 정치경제학 개념은 'economy'의 어원인 그리스어 oikonomos, 즉 가정관리를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가정관리를 국가차원으로 확대한 경우,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국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개인들의 이해가 대립하고 모순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개인들의 이해대립 혹은 모순 문제에 맞서 국가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일반의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반의지는 모든 개인들의 의지의 합이나, 평균 혹은 중간값을 의미하지 않는다. 루쏘에 의하면, 일반의지에 따라 국가를 관리하는 정치경제학이 체계를 형성하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은 만족감과 함께 국가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한다.

루쏘가 정치경제학의 성립에 필요한 관점으로 도입했던 일반의지는 아담 스미스에게로 오면 '공정한 관객'으로 발전한다.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각자 자신들의 열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을 시작하는데, 이러한 개인들의 행동들이 국가에게 최상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의의 개념에 근거를 둔 공정한 게임규칙이 적용돼야 한다. 모든 개인들의 이해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불편부당하고 정의로운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관점은 바로 공정한 관객의 관점이다.

정치경제학이 형성되기 위해서, 근거로 삼어야 했던 일반의지 혹은 공정한 관객의 관점은, 경제학의 역사 속에서 점차 국익의 관점으로 변환됐다. 국익의 계산에 따라 사회적 정의가 규정됐고 그에 따라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의 법적 제도적 환경에 세워졌다.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특히 최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국익 혹은 거시경제지표 상으로 나타나는 경제성장이 국민 개개인의 소득 증가를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각됐다. 그리고 그 결과 국익을 사회적 정의와 동일시해 온 경제적 규정들과 그에 기반한 시장경제가 도전을 받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Occupy운동이나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이 초래한 현상이 시장경제가 직면한 도전의 사례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상황에서 제도 정치권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야당이나 경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저성장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게임규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현재 위기 상황에 맞서기 위해, 시장을 규정할 새로운 게임규칙의 모색은 규칙 도출에 근거가 되는 사회적 정의를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by invisibleman 2015. 6. 2. 22:49
케인즈는 거시경제의 성과를 고용을 단위로 측정한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은 케인즈의 경제주체들 중 어느 누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개입하는 변수가 아니다. 기업가는 기업활동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고용할 양에만 관심을 가질 뿐 경제 전체의 고용 수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물론,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에 대한 기대가 유효수요의 크기를 예측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효수요를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로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이기 때문에, 기업가의 행동을 전체 고용 수준의 함수로 환원할 수는 없다. 노동자 또한 전체 고용 수준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용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고용수준은 경제주체들 간의 경제적 관계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경제 시스템 혹은 시장을 구성하는 변수로 포함될 수 없다. 전체 고용 수준에 관심을 가지는 주체는 경제 시스템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시장 밖에서 고용의 양을 측정하고 질적 평가를 내리는 국민계정 담당자나 행정관료 혹은 정치가가 그러한 주체일 것이다.
정치가들이 고용수준에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결정을 하는 화폐정책이 화폐의 창출과 배분을 통해, 사회적 분업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 그로 인해 고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들은 경제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주체라기보다는 경제시스템을 형성하는 주체로서 인식돼야 할 것이다. 즉, 화폐경제에서 경제주체들은 화폐의 창출과정에 참여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된다. 화폐의 창출과정에 참여해 화폐를 배분받는 주체는 기업가로 정의되고 이들은 분배받은 화폐를 가지고 상품이나  노동을 구입해, 자신이 계획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들은 경제주체로서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 화폐의 창출과정에서 화폐를 배분받지 못한 주체들은 배분받은 화폐가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소비나 생산 활동을 영위할 수 없다. 화폐창출과정에서 화폐를 배분받지 못한 개인들 중 일부를 기업가들이 고용해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경우에만, 그들은 소비나 저축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제주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화폐의 창출과 배분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고용은 화폐경제에 존재하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에 개인을 편입하는 사회화의 장치다. 따라서 화폐배분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고용되지 못한 개인은 경제주체로서 경제체제에 편입될 기회를 얻지 못해 사회화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실업은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도 병리현상이다. 이러한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통해 소외 없이 모든 개인을 사회화하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정치가의 입장에서는 실업과 소외의 발생과 존재에 대해 자신이 책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에 정치가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용을 단위로 삼은 케인즈의 경제학은 경제주체의 사적 이익 추구를 통해 최적의 사회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가 극대화할 수 있도록,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정치가 조절해야 한다는 아담 스미스가 정의한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정치경제학 전통에 잘 부합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역시 '입법자의 과학'의 전통에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사회적으로 최선인 결과를 초래하도록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추구하는 사적 이익과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얻어진 최선의 사회적 결과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근대사회의 개인은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전근대적 개인과는 다르다. 근대적 개인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존재다. 보다 정확하게는 개인은 논리적으로 사회가 정의되기 전에 먼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별, 신분, 지역 등에 의해 정해진 사회구조 속 위치에 의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능 중 하나를 수행하도록 정해진 전근대적 개인과는 달리, 근대적 개인은 독립적으로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 때, 사적 이익은 논리적으로 사회에 앞서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측정단위에 선행하기 때문에 사회적 표현을 가질 수 없다. 사적 이익은 단지 개인의 열정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열정에서 유래하는 사적 이익 추구들이 모두 공존할 수 있을 때, 사적 이익은 객관적인 사회적 표현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낸 사회적으로 최선인 결과는 사적 이익과는 다른 관점에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측정의 기준 또한 동일할 수 없다.

열정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사적 이익이 사회적 표현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한 개인이 추구한 사적 이익이 다른 개인들의 사적 이익과 공존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개인들은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시장에서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는 교환을 통해 이뤄진다. 교환행위는,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이 타고난 자연적인 성향에서 유래한다.
교환 이전에, 개인의 열정은 노동을 통한 생산활동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물은 교환의 대상이 된다. 교환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교환에 참여하는 한 경제주체가  다른 경제주체의 활동의 결과물을 인정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해당 경제주체의 위치에 전이해서 생산물로 표현된 열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감 혹은 타인의 공감을 통해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에 대한 타인의 승인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자신의 열정과 사적 이익 추구를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일정 범위 내로 제한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처럼, 두 경제주체 간의 거울놀이처럼 진행되는 공감 작용을 통해 두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 간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하지만 이 교환비율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한 비율일 뿐으로 당사자 외 제3의 경제주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평가는 되지는 못한다. 사적 이익은 여전히 사회적 표현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이다.

사회적 평가로 진화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교환의 외연적 확장이다. 한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과 교환될 수 있는 대상이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로 확대된다. 외연적 확장 전에는 두 주체 사이에서 이뤄지던 거울놀이인 공감작용이 교환의 외연 확장과 함께 한 주체와 그외 나머지 주체 간의 일대일 공감작용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외연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공감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교환비율은 여전히 사회적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즉 자신의 열정의 산물의 평가를 공감을 통해 다른 경제주체들의 열정의 산물과의 일대일 교환비율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가지수만 증가했을 뿐  앞에서 말한 사회적 평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즉, 일대일 교환비율 수가 증가하는 것만으로는 교환비율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교환비율이 되지 못한다.

사적 이익이 사회적 표현을 획득하는 것은 스미스의 체계에서는 공정한 관객의 존재와 연결돼 있다. 공정한 관객은 특정 개인들의 사적 이익을 다른 개인들의 사적 이익보다 선호하는 편향성을 가지지 않은 주체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관객의 행동은 수많은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정의'만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정한 관객은 사법 체계를 닮았다. 사법 체계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하지만 개인들이 모두 사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사법 체계는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는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권리를 보장함에 있어 사법체계에 내재한 제한은 공정한 관객의 행동을 반영해야 한다.
공정한 관객은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관계를 사전적으로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우리의 견해와는 반대로, 모든 개인들이 공감 작용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공정한 관객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공정한 관객은 신중함의 미덕을 실천하는 개인으로서, 그의 사적 이익 추구는, 공감 혹은 타인의 공감과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도덕적 승인의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타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공정한 관객의 출현은 로크에게서 자연상태의 종말을 가져오는 사회계약의 성립에 비유할 수 있다. 로크는, 홉스와 달리, 소유권을 정치권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도 이미 형성된 것으로 인식했다. 로크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어떤 물건을 사용하려면, 인간은 자연의 상태에서 발견한 그 대상에 자신의 노동을 첨가해야 한다. 바로, 이처럼 노동을 첨가하는 과정에서,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의 사회적 성격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적 상태에서 출현한 소유권도 다른 사회구성원과의 공존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도덕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로크는 소유권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제한을 둔다. 소유하는 행위가 타인을 해치거나 타인에게 빈곤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모든 낭비는 비도덕적이어서 금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이러한 제한이 생산과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노동에 의지한 부의 축적은 그 양이 제한적이어서 상기한 두 가지 제약조건이 실제로 노동이나 축적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폐의 등장은 모든 상황을 변화시킨다. 로크에게 있어, 화폐는 자연상태에서 등장한다. 화폐는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부의 저장을 가능하게 한다. 부패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화폐는 무제한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로 인해, 사회구성원 간에는 부에 대한 욕망이 충돌하기도 하고, 부존량이 제한적인 천연자원의 사용을 두고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이 나타난다. 즉, 로크가 제기한 두 가지 제약은 화폐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도덕에 관련된 자연법칙이 명백하고 이성의 도움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의 출현으로 발생한 이해상충은 자연적인 사회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로크의 해결책은 자연상태를 포기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권력을 세움으로써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연법칙, 특히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다시 돌아가면, 개인의 열정 추구가 해당 개인의 입장에서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적 이익의 추구가 사회적으로 최선의 결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표현을 획득해야 한다. 케인즈의 고용수준은 그러한 사회적 표현의 한 사례가 된다.
by invisibleman 2015. 5. 6. 23:08

시장 혹은 경제는 정치와는 별개의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는 경제나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수록 시장은 더 많은 혹은 효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학 강의실과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가 세입과 세출의 규모, 수단과 방법을 결정하는 재정정책이나 유통수단인 화폐와 관련된 통화정책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니, 재정정책이나 화폐정책 등 제한된 범위에서, 시장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의 효율성을 달성하는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정부의 경제개입은 용인되고 있다.

하지만,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 등에서 정치의 개입은 아주 중요한 변수로 취급된다. 최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폐정책이 매우 중요한 화제가 되고 있다. 가까이는 지난 3월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2%에서 1.75%로 인하한 것이 좋은 예다. 또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의 금리결정과 금리 관련 언급은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화폐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를 안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양적완화와 테이퍼링 같은 용어가 회자되기도 했다.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일부 EU회원국의 재정위기가 가져온 금융시장의 불안정은 우리의 관심을 유럽중앙은행의 화폐정책에도 쏠리게 했다. 위기극복과정에서 양적 완화를 시행함에 있어,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에 비교해, 덜 적극적이고 보다 신중한 유럽중앙은행의 태도는 많은 분석의 대상이 됐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와 유럽 중앙은행의 행동 비교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두 중앙은행이 설정한 정책목표의 차이에 주목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화폐정책이 물가안정뿐만 아니라 성장과 고용도 추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반면 유럽 중앙은행은, 유럽 재정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화폐정책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정관에서는 물가안정을 유일한 정책목표로 두고 있다. 한국은행은 정책목표로 물가안정 외에도 일본 중앙은행과 동일하게 나라경제의 건전한 발전과 영국 중앙은행의 목표이기도 한 금융안정을 명시하고 있다

정치의 경제개입을 최소화하려는 풍토 속에서 화폐정책은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외부의 충격을 받았을 때 회복하는데 필요한 구급 키트처럼 인식되고 있다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화폐정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인데, 단순히 물가안정, 성장, 고용 같은 거시경제 목표 달성을 위한 응급키트로 환원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장하려고 한다.

우선, 화폐정책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인 경제구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이고 싶다. 화폐를 창조하고 경제주체들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정치논리가 개입하게 된다. , 화폐의 정의에는 화폐의 공급과 관련된 정치적 선택이 내재해 있고 그 결과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기업가로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로 규정된다이어서 화폐공급과정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경제주체들의 존재로 인해, 거시경제 목표달성을 위해 시행되는 화폐정책은, 앞에서 인용한 사례가 암시하는 것보다는, 의도한 결과를 달성하는 데 있어 훨씬 불확실하다이 글에서는 내세우는 주장들은 케인즈에게서 영감을 받은, 주류경제학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관점과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화폐의 정의를 고려하면, 정치 혹은 국가기구는 화폐의 발생에서부터 경제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시작해 보자.

화폐는 중앙은행에 의해 ''에서 창조된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공급하는 대출은 중앙은행이 ''에서 만들어내는 본원통화라는 재원을 통해 이뤄진다. 중앙은행 장부의 차변에는 시중은행별 대출금액이, 대변에는 본원통화 금액이 기재된다.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으로부터 공급받은 대출을 재원 삼아 예금통화를 만들어 민간에 공급한다. , 중앙은행이 공급한 본원통화를 재원 삼아, 시중은행이 경제주체들에게 대출을 하면, 경제주체들은 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예금의 형태로 해당 은행에 보유한다. 그러면 시중은행은 경제주체들의 예금에서 중앙은행에 대한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금액을 재원 삼아 또 다른 경제주체들에게 대출을 할 수 있다. 이들 경제주체 역시 지급이나 지불 만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대출 받은 금액을 예금형태로 보유하고 시중은행은 다시 이 예금에서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금액을 재원 삼아 또 다시 대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지불준비금으로 인해 대출 재원이 소진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시중은행에 의해 창출되는 화폐를 예금통화라고 한다. 시중은행 장부의 차변에는 경제주체들에게 공급한 대출금 액수가 그리고 대변에는 중앙은행의 대출금과 대출받은 경제주체들이 해당은행에 가지고 있는 예금액이 기재된다.

화폐는 중앙은행과 예금은행으로 이뤄진 금융시스템의 채무로 금융시스템이 경제주체에 대해 대출 형식으로 가지는 채권을 대가로 경제주체에게 공급된다. 이 과정에서 이뤄지는 화폐의 주고받음은 재화나 서비스의 판매와 구매로부터 비롯되는 화폐의 주고받음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금융시스템은 경제주체로부터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한 대가로 화폐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주체의 상환약속을 대가로 화폐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일단 금융시스템으로부터 화폐를 제공받은 경제주체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기획했던 생산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다. , 그는, 시중은행이 공급한 화폐를 이용하여, 노동력을 고용하고 생산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를 구매한 다음, 그가 상업적 성공을 꿈꾸는 제품을 생산해 시장에서 그 꿈의 실현 여부를 평가 받을 수 있다.시장에서 경제주체들 중 일부는 금융시스템으로부터 대출받은 금액 이상의 수입을 거두는 반면 다른 일부는 대출 금액을 상환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을 시장에서 수입으로 거둔다. 이것이 시장의 평가다.

금융시스템의 대출에 기반한 화폐경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시장의 평가가 내려진 이후에, 경제주체는 금융시스템으로부터 대출받은 부채를 일정 이자와 함께 상환해야 한다. 적자를 본 경제주체가 금융시스템이 대출해준 금액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흑자를 거둔 경제주체에게 상환에 부족한 금액을 빌려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폐제도의 지속성을 위해, 흑자 경제주체와 적자 경제주체 간에 금융시장이 형성되고 거래가 발생한다.

경제주체가 시중은행을 상대로 대출을 상환하는 순간에 대출을 통해 해당 경제주체에게 공급된 화폐는 소멸된다.

중앙은행의 본원통화에서 비롯되어 시중은행의 부채로서 창출되는 화폐는 재화와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재화는 개별 경제주체들의 주관적인 기획에 따라 생산된다. 재화가 사회적인 의미, 즉 생산자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타인들의 인정을 받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존재로 거듭 나게 되는 계기는 시장에서 수요를 만나 가격에 해당하는 화폐량을 대가로 교환되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기획에 의해 생산된 결과물이 사회에서 상품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화폐는 사회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화폐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으로 이뤄지는 금융시스템이라는 공공영역에서 창조된다는 사실에 의해 이미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마치 언어의 경우, 정의에 의해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며 오직 공동체의 언어만이 가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언어의 경우처럼, 동일한 화폐 단위의 사용을 근거로 경제공동체를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동일 화폐단위로 정의되는 경제공동체는 국민경제라고 불린다. 화폐는 정의에 의해 중앙은행을 포함하는 공공부문을 내포하고 있고 개인들간에 이뤄지는 인정 과정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재화에 대해 경제주체들간의 인정이 이뤄지는 시장이 형성되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 , 화폐는 시장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금융시스템에 의해 창조되는 화폐를, 해당 화폐를 사용하는 사회에 존재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배분하는 것에는 시장의 논리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화폐의 공급 또는 배분이 논리적으로 시장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논리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의 배분 혹은 공급 과정에 이미 정치가 개입하기 때문에, 화폐정책은 단순히 외부 충격이라는 응급상황을 다루기 위한 구급 키트로 환원될 수 없다. 산업정책을 반영하여 특정 산업에 대한 대출을 장려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만성적인 실업, 특히 청년실업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부동산 자산가격의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정치권력을 가진 정당의 시각이 화폐정책의 방향을 결정한다.

금융시스템에서 창출된 화폐는 공동체 내 모든 개인들에게 배분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인들은 금융시스템이 창출한 화폐배분에서 완전히 소외 당하기도 한다. 금융시스템이 창출한 화폐에 대한 보편적 접근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앞에서 보았듯이, 화폐의 창조와 공급 그리고 이어지는 순환과 소멸 과정은 화폐공급의 대상이 되는 프로젝트의 상업적 성공에 좌우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중은행은 화폐를 공급함에 있어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담보를 제공할 수 있거나 과거에 이미 프로젝트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실적이 있는 경제주체가 화폐 공급의 우선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프로젝트가 생산요소의 결합을 통한 재화의 생산 혹은 서비스 제공을 내포하는 경우, 이러한 프로젝트는 일반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 기존에 성공한 프로젝트를 확장하는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화폐를 공급 받는 개인의 수는 오히려 점점 축소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화폐공급을 받은 개인은 기업가라는 경제주체로 전환된다.

화폐를 공급 받지 못하는 개인은 화폐가 유일한 교환의 매객역할을 하는 화폐경제에서 일단은 경제주체가 되지 못한다. , 그의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시중은행에 의해 화폐공급의 대상으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프로젝트 실현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소비생활을 할 수 없다. 화폐 공급을 받은 경제주체와 고용계약을 맺어 경제주체의 프로젝트 실현에 참가하거나(생산적 노동) 혹은 비생산적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경우에만, 그는 자율적으로 소비와 저축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제주체가 된다. 화폐 공급을 받지 못한 개인이 경제주체가 될지 여부는 화폐 공급을 받은 경제주체인 기업가의 고용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되는 것이 기업가의 고용 결정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기업가와 화폐 공급을 받지 못한 개인 사이에는 종속관계가 성립한다.

정치는 화폐를 창조하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 공동체 성원 간의 주종관계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성원 간의 주종관계에 대해서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화폐 공급의 대상이 되지 못해 생존을 위해 경제주체에 고용되지 않을 수 없는 개인들의 경제적으로 박탈감을 완화하기 위해 최저임금이나 복지제도를 통해 적극 개입해야 한다.

화폐경제는 적어도 기업가와 노동자라는 두 경제주체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화폐의 창조와 공급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두 경제주체의 존재가 거시경제 목표를 지향하는 화폐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 경제학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와 케인즈가 1930년대 대공황를 맞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했던 화폐정책을 비교하고자 한다.

어빙 피셔는 대공황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자신의 전재산을 잃어 버렸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부채-디플레이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일차대전 종전 이후부터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미국의 주식시장은 큰 화황을 누렸다. 그 이유는 일차대전 동안 전쟁 무기로 실현됐던 과학기술의 발전이 종전과 함께 경제적 목적에 동원되면 생산성 향상과 그로 인한 이윤 증가를 초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일반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반화된 기대를 토대로 많은 개인들이 주식에 투자를 했고 부채를 동원해 투자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황의 전조가 나타나는 과정에서 주식가격이 변동을 거듭하자, 투자자금의 대출해줬던 은행이 채권회수에 나섰다. 채무자인 주식투자자는 주식을 팔아서 은행에 대한 채무를 상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주식가격은 급락했고 채무자인 주식 투자자는 주식을 팔아도 은행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주식 투자자는 물론 은행마저도 연쇄도산에 빠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은 상품의 가격을 인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가격인하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부진하고 재고는 쌓여 생산과 고용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대공황의 시기에 부채를 동원한 투자의 과열이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피션의 부채-디플레이션 이론이다.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피셔가 제시한 정책들은 화폐의 유통속도를 높이거나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대표적인 것이 stamped money. stamped money는 화폐에 일정 유통기한을 정해 그 기한을 넘기면 액면가의 일정 비율이 상쇄도도록 해, 경제주체들이 화폐를 보유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빠른 시간 내에 지출하도록 하는 장치였다. stamped money는 실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몇몇 소도시에서 사용된 적이 있고 미국의 일부 소도시에서도 사용됐다. 하지만 루즈벨트 정부의 화폐 대체물의 전면 금지 조치에 따라 소멸됐다. 또 다른 정책은, 당시에는 달러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으로 정의하는 금본위제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금 대비 달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조치를 취해 보다 많은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디들레이션이 화폐 혹은 금융부문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유통속도가 정상화되고 화폐량이 증가하면서 화폐 혹은 금융부문이 안정화되면 디플레이션도 해결될 것이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 디플레이션 혹은 대공황의 상황에서도 시장기구에 의해 조절되는 실물부문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화폐 유통속도가 정상화되거나,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 경제주체들의 축장으로 감소된 화폐량이 확대되면, 단기간에 균형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피셔의 대공황의 설명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인 화폐정책은 케인즈의 것과는 구별된다. 케인즈에 의하면, 경제주체가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되고 화폐의 창출과 공급이 기업가의 수요에 한정되는 화폐경제에서 비자발적 실업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실업을 근거로 화폐임금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되면, 기업가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도 하락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임금 하락에 따른 상품의 가격하락이 수요 증가를 초래할 수도 있으나 케인즈는 대공황과 같은 시기에서는 임금하락과 그로 인한 상품가격의 하락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격하락과 비관적인 유효수요 전망을 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비관적인 유효수요 전망은 또 다른 고용의 하락과 생산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임금하락과 가격수준 하락 그리고 고용과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귀결된다.

케인즈의 경제에서는 가격의 자동조절기능이 시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생산 수준과 고용량을 결정하기 위해 예측하는 유효수효의 크기에 의해 고용과 생산 규모 같은 경제의 상황이 결정된다. 대공황 같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한 화폐정책도 우선 기업가들이 전망하는 유효수요의 증가를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 유효수요의 증가는 케인즈 경제모델의 세 가지 독립변수의 변화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변수는 한계소비성향, 자본의 한계효율 그리고 유동성선호다. 기업가의 투자의사 결정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자본의 한계효율은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을 포함하는 결정요인들이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자율이 증가하면 하락하고 이자율이 하락하면 증가한다. 유동성선호는 경제 내에서 정상이라고 인식되는 이자율 수준과 통화당국이 결정한 이자율 간의 격차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좌우되는데, 정부가 기준금리를 정책적으로 낮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경제주체들이 정상금리 대비 정책 금리의 수준이 지속될 수 없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낮은 금리를 유지하며 증가시킨 통화량은 정부의 의도대로 투자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경제주체들은 증가한 화폐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보유하려고만 할 것이다.

이처럼, 케인즈 모델에서 화폐는 단순히 유통속도나 물가수준을 통해서만 경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화폐가 창출되고 기업가에게 공급되는, 화폐의 정의 그 자체에 의해서, 화폐는 경제에 관여하는 것이다. 화폐경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경제주체들이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된 경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정책은 화폐가 창출돼 경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미 경제의 고용이나 생산수준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가 경제에 관여하는 것은 화폐정책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정치의 경제에 대한 개입은 케인즈 경제에 한정된 특징인가? 그렇지 않다. 정치와 경제에 관해서, 오히려 케인즈는 근대경제학 탄생기의 전통을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근대경제학이 정치경제학 혹은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태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경제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케인즈에서 경제이론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행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은 이하에서 살펴볼 스미스의,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경제학 또는 18세기 태동기의 경제학과 정치철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by invisibleman 2015. 4. 21. 18:07

"일반이론" 18 '고용의 일반이론 재설'에서 케인즈는 파라메터, 독립변수 그리고 종속변수로 이루어진 그의 거시경제 모델의 구조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케인즈의 거시모형은 어느 시점에서 주어진 경제체계의 사회구조, 현존하는 노동 및 자본의 질과 양 등을 파라메터로, 한계소비성향, 자본의 한계효율, 유동성선호, 화폐임금율 그리고 화폐량을 독립변수로 하여 국민소득과 고용량을 결정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 케인즈 혹은 거시경제학자는 경제체계 전체의 고용규모에 관심을 가지는가?

케인즈 모형에 포함돼 있는 두 주체는 기업가와 노동자다. 기업가들은 주어진 자본설비를 어떤 규모로 가동할 것인지 즉,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노동 몇 단위를 고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고용 여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모형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경제주체도 경제체계 전체의 고용규모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 세 번째 주체가 등장한다. 이 주체는 경제모델에 포함돼 있는 기업가나 노동자와는 달리 경제 모델 외부에 존재한다. 세 번째 주체는 국가, 혹은 전체 고용규모를 일정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정책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인이다. 케인즈는 이 세번째 유형의 주체의 관점에서 고용량을 종속변수로 하는 모델을 구성했고 또 그 모델을 통해, 고용량을 일정 수준에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변수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렇게 국가 혹은 정치인은 모델에 포함된 주체가 아니라 모델을 구성하는 주체다.

 

케인즈의 사례는 경제학이 정치와 가지는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정치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아담 스미스가 그의 두 저작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전개한 입법자의 과학을 통해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스미스의 용어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이 이 글의 내용이 될 것이다. 스미스의 경우에도 경제모델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가 존재한다. 바로 공정한 관객(the impartial spectator).

 

스미스가 활동하던 18세기에서 과학은 소수의 원칙과 연역의 방법으로 도출되는 명제들로 구성되는 체계였다. 원칙의 수가 적을수록 그리고 설명되는 현상이 많을수록 좋은 과학체계가 된다.

 

스미스의 입법자의 과학은 인간 심리에 관한 전제에서 출발해 자연법 체계의 성립을 지향한다. 스미스에게 있어 자연법은 모든 국가들이 운용하고 있는 법들 속에 내재해 있고 토대가 되는 일반원칙들이다. 입법자의 과학은 크게 4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소유권의 보장과 관련된 정의(justice); 위생, 안전, 치안, 국내 및 국외 교역의 권장 등을 포함하는 내치(police); 조세부담의 배분과 관련된 세입(revenue); 외국의 침입에 대해 국가를 방위하는 것과 관련된 국방력(arms). 이러한 주제들로 구성된 입법자의 과학은 입법자의 활동이 국가의 정의와 풍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 , 입법자의 과학은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에서 출발해 국가의 정의와 풍요를 생산하는 메카니즘을 분석하기 위해 도덕철학과 정치경제학을 이용한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인간 주체의 동기와 자기이해에서 출발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연결된 소수의 원칙들의 체계다. 따라서, 도덕철학은 사회의 규칙성과 조화뿐만 아니라 이것을 만들어내는 인간 주체의 심리적 요인들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토마스 홉스는 도덕철학을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자연법에 관한 과학으로 분류했다. 홉스에 의하면 평화로운 관계와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 선이고 도덕적인 덕인 반면,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거나 전쟁을 초래하거나 혹은 사회의 지속성을 해치는 것을 악 혹은 악덕이다. 자연법이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만큼, 자연법에 대한 과학이 도덕철학이 된다.

 

인간주체의 심리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홉스의 개념보다는 허치슨의 개념에 보다 더 가깝다. 왜냐하면, 감정과 취향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유래하는 행위와 대상의 다양성 그리고 가변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타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등 요인의 복잡함으로 인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많은 자연적 욕구 등으로 이뤄져 혼돈처럼 보이고 일관되지 못한 원칙들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본성에서 자연적인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원칙들을 찾는 것이 허치슨의 도덕철학이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심리, 즉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명백히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함에도 다른 이의 흥망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동일하게 자신의 감정, 열정, 행위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심리기제가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이러한 심리기제가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는 '동감(sympathy)'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감은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처지에 이입하여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동감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런 판단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을 타인들이 동감을 통해 긍정적인 판단 혹은 승인해 줄 것을 바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은, 스미스에게는 모두가 무대에 서 있는 동시에 객석에 앉아 있는 연극무대와 유사하다. , 소통은 타인이라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설득하려고 동감을 통해 도덕적 승인을 이끌어내려는 인간 주체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감에 내재해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로 인해, 관객인 타인은, 무대 위에서 도덕적 승인을 요구하는 한 인간 주체의 감정, 열정, 행동에 항상 전적으로 이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적인 동감이 쉽지 않다는 문제로 인해, 무대 위의 주체는 객석에 있는 관객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열정을 본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먼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관객의 반응은, 스미스에 의하면, '적정성(propriety)'에 의해 좌우된다. , 통상적으로 유사한 환경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의 편차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 적정성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동을 동감하고 승인한다. 따라서 타인의 동감을 얻으려는 심리기제는 우리에게 먼저, 타인이 승인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행동을 완화하도록 이끈다.

 

타인이 동감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와 감정을 완화하려는 노력들은 도덕률로 진화한다. 스미스의 체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도덕률은 선과 악에 대한 이성의 판단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소통과 관련된 개인들의 경험이 모여 형성됐다. 도덕률은 동감을 통한 타인의 승인을 추구하는 본성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자기애(self-love)가 타인이 허용하는 혹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 타인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에 따라, 모든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억제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라는 개체의 유지에 필요한 도덕적 규율이 성립된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또 다른 개념을 채택해 도약을 한다. 그 개념은 '공정한 관객(the impartial spectator)'이다. 공정한 관객은 '가슴속에 있는 내부인간 (the man with the breast)', '위대한 동거인 (this great inmate)', '경외롭고 존경스런 판사 (this awful and respectable judge)', '전지적 심판자 (the all-seeing Judge of the world)'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지적 심판자인 공정한 관객이 어떤 개인의 행위를 승인한다면, 그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공정한 관객은 개인과 그가 이입할 수 있는 관객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의 결여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다. , 공정한 관객의 관점을 통해, 스미스는 도덕적 규율이 가질 수 있는 우연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보편성으로 인해, 공정한 관객은 도덕적 규칙이나 도덕적 판단을 비판할 수 있다.

 

스미스의 입법자 과학에서 공정한 관객은 왜 등장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정한 관객이 '적정성'과 이어져 있고 적정성은 다시 '정의(justice)'의 개념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스미스는 "법학 강의Lectures on Jurisprudence)"에서 침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정의의 목적이라고 규정한다. “도덕감정론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를 입히[1], 불의가 만연한 상황에서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다고 한다.

불의 혹은 부정의로 인해 침해받는 대상이자 정의가 보호하려는 대상은 그 실현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제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perfect rights)'로 한정된다. , "우리가 이웃에게 어떤 상해도 주지 않고, 그의 인격이나 그의 명예를 직접 손상시키 않"[2]는 것이 정의가 지향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는 '조정적인 정의(commutative justice)'에 해당한다. , 법이 허용한 재량권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매매계약 같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적정한 교환비율을 통해 참여자 모두가 이익과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스미스의 정의가 지향하는 것이다. 이 적정한 교환비율은 그의 국부론에서 자연가격으로 발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구별되는 스미스의 정의의 개념이 가진 특징은 산술평균처럼 이성을 통하거나 사전적으로 규정된 법과의 부합 여부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도덕감정인 동감의 작용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침해가 중요성을 가진다. , 침해의 발생이 완전한 권리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그의 분노의 표현 중에서 더 많은 것을 적절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침해를 복수하기 위해 사용되는 폭력도 승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미스에게 있어, 정의가 보호해야 하는 완전한 권리는 동감이라는 도덕감정의 작용으로 생성된다.

하지만, 동감의 작용에 의한, 침해에 대한 보복의 승인은 침해와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의를 규정하는 동시에 불필요한 침해와 보복의 악순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공정한 관객이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공정한 관객의 관점에서 국가는 민법이나 형법과 같은 법규를 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규들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입법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입법자의 과학이다.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자연법(natural jurisprudence)을 각국의 법률들이 모두 공유하게 되는 것도 입법자의 과학의 기여다.

공정한 관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입법자의 관점이 된다. 그리고 입법자의 입법활동을 통해 국가가 법률 체계를 갖추게 되면, 동감능력을 기반으로 도덕률을 추구하던 주체들은 더 이상 상대방 혹은 이웃을 대상으로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공정한 관객의 관점은 민법이나 형법의 조문을 통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법을 통해 마련된 정의 구현장치가 도덕을 대체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동감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동감능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시회 구성원들이 법과 국가권력에 기꺼이 부여하는 권위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사법체계에 대한 도덕적 승인을 지칭하는 효용이다.

 

도덕감정론에서 나온 입법자의 과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애(self-love)를 추구하는 동시에 타고난 동감능력으로 인해 타인의 도덕적 승인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이 공감하여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규정된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동감능력에 기반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도덕률이 형성된다. 그러나 도덕률만으로는 사회의 조화나 질서가 성립될 수 없다. 사회의 질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관객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정의의 규칙들이 필요하다. 이 정의의 규칙은 입법자들의 입법활동과 정부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행된다. 입법자의 과학은 바로 이 과정에서 기여한다. 법령체제를 갖춘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은 법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개인들의 상호과정에 내재한 조정작용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법령체계에 의한 조정은 보이는 손으로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감정론은 사회질서를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균형으로 설명한다.

 

이 글은, 아담 스미스의 대표적 저작인,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간에는 19세기 일군의 독일 경제학자들이 '아담 스미스의 문제(Das Adam Smith Problem)'라고 불렀던 괴리가 존재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두 책은 모두 공통된 방법론과 설명원리들을 가지고 제반 사회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엽법'에 관한 과학인 도덕철학의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하에서는 도덕감정론에서 발견했던 입법자의 과학이 국부론에서는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스미스의 체계에서, 부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동기는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감을 통해, 부는 추구하지만 가난은 피하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공유하는 동류로부터 도덕적 승인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다.

도덕감정론에서 타고난 동감 능력으로 인해 타인의 도덕적 승인이 필요하듯, 국부론에서 인간은 교환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형성해서 타인이 생산한 재화를 교환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 인간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면, 이 교환성향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 형성된다. 분업이 형성되면 생존이나 욕망충족을 위해 필요한 재화 중에서 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다. 대신 개인은 스스로 노동투입량을 조정하여, 자신의 생산물이 필요량을 초과하여 잉여가 존재할 수 있도록 생산한다. 자신의 잉여생산물을 대가로 타인의 생산물 중에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거나 욕구를 충족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개인은 생존을 교환에 의지하게 되면서 생산자이면서 상인이 되고 사회는 상업사회로 진화한다.

 

상업사회에서 동감능력은 노동생산물 간의 교환비율을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자본의 축적과 토지 사유화가 진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A상품과 B상품 간에 교환이 이뤄진다고 하면, 일정량 B상품과 교환되는 A상품의 일정량의 가치는 그가 구매할 수 있는 B상품의 일정량을 해당 생산자가 생산하는데 소요되는 노동의 양으로 정의된다. 자본의 축적과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면, 생산물의 가치는 해당 생산물 일정량과 교환되는 일정량의 또 다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에 대한 적절한 보상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만든 생산물 중 일부를 다른 사람이 생산한 생산물 일정량과 교환하기 위해서는 교환 상대방이 내가 수요를 가지고 있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하한 노동, 자본 토지의 양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생산물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우연적인 만남에서 서로 만족하는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각자 교환 대상물을 생산한 생산자의 처지에 이입하여 교환에 필요한 양의 해당 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의 양을 추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감의 작용을 통해, 두 생산물 간에 교환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가격이 결정되는 방법은, 각자가 생산한 상품이 우연히 상대가 가지고 있는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경우에 두 생산물의 일정량 사이에서 교환비율이 형성되는 것과는 다르다. 교환비율을 통해 교환이 이뤄지는 사회와 가격의 도움으로 교환이 이뤄지는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가격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교환은 우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독립적인 경제주체들이 교환을 목적으로 사회적 분업체계에서 특화한 상품을 생산한다. 그리고 가격은 표시 수단으로 화폐의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화폐를 주조하고 사회에 공급하는 사회 외부의 기관도 전제된다. 또한, 하나의 상품에 대해서는 동일한 가격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가격의 존재는 시장의 존재를 전제한다. 스미스 체계에서 국부의 원인은 시장의 확대다. , 경제활동에서 자애 혹은 자신의 이익 추구를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편익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가격기구에 의해 조절되는 경쟁시장과 노동의 분업구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장의 기원은 동감작용에 의한 교환의 확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정의가 동감에 기초한 도덕률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국부론에서는 스미스는 가격을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으로 구분한다. 먼저, 어떤 생산물의 시장가격은 시장에 출하되는 양과 이 생산물에 대한 유효수요의 비율로 결정된다. 유효수요는 시장에서 해당 상품을 획득하는 대가로 그 상품의 자연가격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이 시장에 제시한 화폐의 수량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화폐량과 출하량의 비율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가격은 상품 1단위와 교환되는 화폐량으로 정의된다.

반면, 자연가격은 해당 생산물을 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평균적인 혹은 적정한 수준으로 지불해야 하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총액으로 정의된다. 자연가격의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평균적인 수준은 해당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에 출하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에 대한 대가를 자연적인 수준에서 지불하는데 과부족이 없는 수준이다.

이 자연적인 수준은 해당 사회의 상황, '부유한가, 빈곤한가, 진보하고 있는가, 정지하고 있는가, 쇠퇴하고 있는가'에 좌우된다. 하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자연임금률, 자연이윤율, 자연지대율은 물론 자연가격의 결정이론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조건 하에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자연적인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정한 관객'이다.

임금의 수준은 노동자와 자본소유자의 계약을 통해 결정된다. 하지만, 교환비율을 결정할 때와는 달라,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하고 자본소유자는 더 적은 임금을 주기를 원한다. 임금교섭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소유자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적은 임금을 위해 각자 다른 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자본가들과 단결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한다. 동감작용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소유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임금수준을 찾을 수 없다.

스미스는 자연적인 임금수준이 노동자가 충분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은 "완전한 정책, 상업과 제조업의 확장" 같은 '고상하고 웅대한 목적'을 추구한다는 미학적인 판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미학적 판단의 타당성은 공정한 관객이 제공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수렴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모든 생산부문의 수익률을 동등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이뤄진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노동, 자본, 토지 등 생산요소를 소유한 경제주체들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과정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사회는 최대한으로 풍족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도덕감정론에서 입법자의 주요 역할은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법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듯이, 시장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경제활동과 관련한, 입법자의 과학의 기본 역할 역시 사회 질서 혹은 시장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정의의 원칙에 따라 법률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법률체계의 핵심은 완전환 권리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보호다. 정의의 원칙에 따른 법률체계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위가 사회와 국가의 풍요로 이어지기 위한 충분조건이다.

두 번째 역할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현재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스미스에게 있어 이것은 중상주의라 불린 정책과 제도의 개혁을 의미한다. 이들 정책과 제도는 교역의 대상이 되는 상품의 생산자에게 독점과 특혜를 제공하는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특혜를 받지 못하는 다른 생산자가 자신이 소유한 생산요소를 자기 이익을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들에게 불의를 가하기 때문이다.

경제영역에서 입법자 과학이 맡은 마지막 역할은 공공사업과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공공사업과 제도는 사회에 아주 유용하지만, 비용을 특정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수익이 충분하지 않아 개인이 설립하여 유지하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미스의 입법자 과학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전개돼 있다. 출발점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감정은 동감능력이다. 인간은 이 감정을 가지고 자애 혹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전제된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상호작용은 각각 도덕률로 혹은 교환관계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연역체계의 성격을 가지는 스미스의 과학은 도덕률에서 정의의 원칙으로 그리고 교환관계에서 시장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논리적 비약을 한다. 비약을 내포하고 있는 정의의 원칙과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스미스의 과학에 의해 인도된 입법자들이 마련한 법령체계라는 보이는 손의 개입이 필요하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통해 주장한 입법자의 과학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서만 정의와 사회의 물질적 충족이 이뤄질 수 있음을 분석하고 있다.

 



[1] 스미스, 도덕감정론 p. 163

[2] 스미스, 도덕감정론 p. 517


by invisibleman 2014. 9. 4. 18:09

1.


Alfonso Cuarón 감독의 2013년 영화 Gravity가 오늘 열린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자연과학의 단어인 Gravity는 경제학에서도 낯설지 않은 단어다. 파생어인 Gravitation와 함께. 왜냐하면, 아담 스미스는 자연가격이 시장가격을 끌어당기는 현상을 Gravitation으로 표현했고 데이빗 리카르도도 임금과 이윤의 자연적 경향을 gravitation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언급했으며 마르크스는 시장가격이 시장가치에 수렴하는 것에 단어 Gravity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Gravity와 Gravitation의 차이점은? 구글을 통해 검색한 결과에 의하면, 전자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임의의 두 물체 간에 작용하는 끌어당기는 힘을 의미한다.


이런 정의를 반영하듯, 쿠아론의 영화 Gravity는 지구 중력에 의해 궤도운동을 하는 스페이스 셔틀에서 시작한다. 스페이스 셔틀에는 이번 비행이 끝나면 더 이상 지구를 벗어날 수 없게 된, 은퇴를 앞둔 우주비행사 매트 코왈스키와 지구 위에서는 살아 갈 유인을 상실하여 우주에서의 생활에 처음 도전한 의사 라이언 스톤이 있다.

이 두 등장인물들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무중력상태에서의 생활은 다른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안정적 상태로 지속되지 못한다. 폐기 위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주 쓰레기가 그들이 탑승한 스페이스 셔틀의 궤도운동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스페이스 셔틀을 파괴하고 코왈스키와 스톤을 제외한 나머지 승무원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스톤은 코왈스키의 도움으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지만 코왈스키를 잃는다. 국제우주정거장마저 우주쓰레기로 파괴될 위험에 처하자 스톤은 혼자 중국의 우주정거장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지구귀환용 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돌아온다. 우주쓰레기가 만드는 위험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페이스 셔틀에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그리고 다시 중국우주정거장으로의 이동은 생존본능의 발로로 보여졌다. 본능에서 초래된, 위험을 피하고 생명을 유지하려는 행동은 죽은 코왈스키의 음성과 라디오를 통해 지구에서 들려오는, 애기를 달래는 어느 사내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을 통해 스톤의 내부에서 지구 위에서 생존하려는 선택으로 전환된다.


영화 Gravity의 내용 역시 경제학의 Gravity나 Gravitation을 연상시킨다. 즉, 스톤은 스스로 자연적인 모습으로 자연상태의 지구상 어느 지점으로 귀환한 것이다. 궤도 상 생활을 가능하게 했던 스페이스 셔틀, 우주정거장, 지구귀환용 우주주선이 소멸했을 뿐만 아니라 우주복마저 벗은 상태로 인간에 의한 개발 흔적이 없는 어느 한적한 호숫가에서 스톤은 복귀한 지구에서 첫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마치 우발적이고 구체적인 요인들로 인해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시장가격이 결국 자연가격으로 수렴하듯이.


2.


아담 스미스의 그래비테이션은 자연가격이 시장가격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래비테이션의 개념에는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이와는 독립적으로 자연가격을 결정하는 법칙이 있다는 전제가 내재해 있다. 즉, 자연가격이 중심이 되어 시장가격을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겨 결국에는 수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연가격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가격결정 메커니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


시장가격과 자연가격을 지배하는 두 가지 법칙의 유기적 결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은 스미스의 시장 개념에게 맡겨져 있다.


자연가격은 상품을 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평균적인 수준으로 지불해야 하는 임금과 이윤의 총액으로 정의된다. (단순화를 위해 지대를 생략했다.) 스미스에 의하면, 임금과 이윤의 평균적인 수준은 상품생산에 필요한 노동과 자본의 재생산을 담보하기에 충분한 수준으로 한 경제의 모든 상품 생산에는 동일한 자연임금률과 자연이윤율이 적용된다. 자연이윤율과 자연임금률은 시장에서 결정되지 않는, 사회가 보유한 자본 혹은 인구의 수준이나 수준의 증가 속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까지 서술한 바에 따라, li의 노동량을 투입한 시장 출하량이 Qi0 인 상품 i의 자연가격(Pin)은 자연이윤율이 rn이고 자연임금률이 wn 인 경우,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Qi0 Pin =(1+rn)wnli


반면, 시장가격은 유효수요와 시장에 출하된 상품량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유효수요는 자연가격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의 수요 혹은 한 상품의 시장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매력의 양으로 정의된다. 즉, 유효수요(Di)는 만약, 시점0에서 시장에 출하된 상품 i의 양이 Qi0인 경우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Qi0 pim= Di

유효수요의 정의로부터, 스미스가 언급한 바대로 시장가격은 유효수요와 시장 출하량의 비율로 결정된다.


그래비테이션 과정 혹은 스미스의 시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가격과 출하량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가격과 유효수요와의 관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앞의 식, Qi0 Pin =(1+rn)wnli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연가격과 출하량의 관계는 자연임금률과 자연이윤율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임금률과 자연이윤율을 설명하는 생산이론뿐만 아니라, 자연가격이론도 부재하기 때문이다. 스미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이론의 공백은 리카르도와 스라파를 통해 상당 부분 채워졌다.


다음으로, 자연가격과 유효수요의 관계를 살펴보자. 경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경제주체들은 자본이나 노동의 소유자로 정의된다. 이들 경제주체들의 소득 혹은 부의 크기를 Rn이라 하면, 시장에 출하된 상품 i에 대한 유효수요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Di= φiRn =φi(1+rn)wnli= φiQi0 Pin


이 때, 벡터φi는 경제 전체의 지출구조로서 상품 i의 구매에 배분된 소득의 비율을 의미하는 요소로 이뤄져 있다. 그래비테이션의 문제는 시장에서 전체 소득이 상품별로 어떻게 분배되는가를 의미하는 벡터 φi가 어떻게 결정되고 그리고 어떻게 변화하는가라는 문제로 전환된다.


그래비테이션의 기본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Pim(t)Qi0(t)= φiRn=constante


벡터 φi는 시장가격이 자연가격으로 끌려가는 동안 변화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벡터 φi를 변화시키는 요인은 그래비테이션 과정 동안 변하지 않는다. φiRn는 i 상품을 파는 시장에 실제로 존재하는 유효수요의 크기를 나타낸다. 이는 i 상품시장에 배분된 소득의 크기와는 구별돼야 한다. 왜냐하면, 유효수요는 자연가격으로 정의되지만 시장별로 배분된 소득은 시장가격으로 정의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유효수요는 그래비테이션 과정 동안에 변하지 않아야 하지만, 시장별로 배분된 소득은 그래비테이션 동안 변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를 유효수요와 시장 출하량의 대면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구매자간의 경쟁이나 상품의 성질과도 관련 짓는다.

먼저, 상품의 성질과 관련해서는, 스미스는 다음 인용처럼 언급하고 있다.

“공급초과분의 크기가 판매자들의 경쟁을 증가시키는 것에 따라 또는 그 상품을 즉시 처분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에 따라, 시장가격은 자연가격보다 다소 하회할 것이다. 동일한 규모의 과잉 수입이라도 썩기 쉬운 상품의 경우가 내구상품의 경우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야기할 것이다. ”


하지만, 스미스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하면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설명함에 있어 사용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품의 성질은 효용을 통해 수요곡선의 기울기를 특징짓는 수요의 탄력성이 아니라 벡터φi로 표현되는 지출구조에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는 지출구조를 변화시키는데 상품의 성질에 따라 이 지출구조가 변화하기 때문에 그래비테이션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어서 구매자 간 경쟁과 관련하여, 스미스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시장에 나오는 양이 유효수요를 초과한다면, 그 상품은 임금과 이윤의 가치총액을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판매될 수 없다. 일부는 보다 적게 지불하려는 사람들에게 판매되어야 하며, 그들이 지불하는 낮은 가격이 상품 전체의 가격을 인하시킬 수 밖에 없다.”


이 구절은 한 상품의 모든 거래에는 단일한 가격이 적용된다는 가정의 선택 유무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단일가격 가정을 선택한 경우에는, 상품 출하량이 유효수요를 초과하여 낮아진 가격은 해당 상품의 모든 거래량에 적용돼야 한다. 따라서 스미스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시장이 처음 열렸을 때 제시된 가격은 시장가격과 다르다. 이는 결국 왈라스의 암중모색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해석은 모든 변수가 실제적이고 유효한 것인 고전파 경제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유일하게 가능한, 단일가격 가정을 포기한 경우에는, 어떤 상품시장에는 차이가 나는 다수의 우발가격에서 동시에 거래가 발생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유효수요와 출하량의 비율로서 정의된 시장가격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연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결정된 우발가격들의 평균가격과 일치하게 된다.

다수의 우발가격은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 부문 내에서 다수의 임금률과 이윤율을 내포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는 서로 다른 생산 분문에서의 임금률과 이윤율의 차이뿐만 아니라 하나의 생산부문 내에서의 임금률과 이윤율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렇게 복잡성이 증가한 결과 그래비테이션 과정은 단순히 자연 임금률 및 이윤율과 시장 임금률 및 이윤율의 차이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의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유효수요는 시장이 열리기 전에 시장과정과는 독립된 요인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경제 전체의 지출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즉, 유효수요는 시장에서 시장가격이 결정되기 전에, 자연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에 근거해 경제의 지출구조에 따라 배분된 구매력으로 정의됐다. 따라서 경제를 구성하는 여러 상품시장으로 배분된 유효수요는, 시장에서 자연가격이 시장가격을 끌어 당기는 동안에, 변하지 않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그래비테인션 개념은 시장과정과는 별개로 사전적으로 규정된 균형을 내포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개인들의 활동의 조화로운 합으로 규정되는 사회는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의 결정과는 별개로, 그리고 개인들의 결정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리고 유효수요를 결정하는, 시장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의 권력분산적 성격에 대비되는, 권력집중적 성격의 기관을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가격, 자연임금률 혹은 자연이윤율에 포함된 ‘자연’은 시장과 독립적으로 상기한 권력집중적 기관에 의해 사전적으로 결정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전파 경제학에서, 자연가격이 시장가격을 끌어당기는 그래비테이션은 이러한 가정 하에서 가능하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과 노동의 소유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가 구성되는 것을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비유를 통해 표현했다. 하지만, 동등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이라는 권력분산적 성격의 시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은 오히려 권력집중적인 기관의 존재를 전제로 작동하고 있음을 이 글을 통해 보았다. 시장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권력집중적 기관의 존재에 대한 무지와 외면이 ‘아담 스미스의 오류’ 혹은 ‘경제신학’이라는 표현에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by invisibleman 2014. 3. 3. 22:03

앞에서 케네의 이론이 실패한 지점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먼저, 경제계급을 정의하는 공통적이고 일관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산활동 영역에 따라 생산적 계급과 무익한 계급으로 구분한 다음, 토지를 소유하고 그로 인해 순소득을 수취하는 지주계급을 첨가했다. 둘째,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에 근거하여 생산적 계급과 무익한 계급으로 분류하였으나,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은 여타 산업에서 생산된 잉여생산물의 가치를 영으로 만드는 생산가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가설에 불과했다. 끝으로, 생산가격 시스템을 통해 정의된 순소득을 지주계급은 별다른 정당화 없이 전유한다.

이하에서는 경제적 계급의 정의,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 지주계급에 의한 순소득의 전유 등 이론적으로 케네가 실패한 지점에서 스미스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스미스에게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케네와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을 구분한다. 하지만 케네처럼 생산활동을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노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나눴다. 생산적인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교환되는 반면 비생산적 노동은 소득의 지출을 대가로 교환된다. , 생산자가 생산기간 동안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와 생산에 소요되는 도구, 장비, 재료 등을 자본가로부터 선대하는 대가로 자본가가 기획한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생산적 노동이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은 노동 그 자체와 구별되는 대상으로 실현되는데, 이 대상이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이다.

하지만 자본이 아닌 지출되는 소득과 교환되는 비생산적 노동은 상품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19세기 부르주와 가정에 고용된 하녀, 정원사나 마부의 노동처럼 노동 그 자체로서 소비된다.

특정한 생산 부분이 아니고 자본이 선대하는 재화와 도구 등과 교환되는 노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농업부분의 배타적인 생산성에 근거한 중농주의자들의 순소득과는 달리, 이윤은 생산적인 노동과 자본 간에 이뤄지는 교환에 근거하는 일반적인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윤은 선대된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는 자본에 귀속되는 소득이 된다.

비생적 노동과 구별되는 생산적 노동을 자본과의 교환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스미스는 자본이 이윤을 전유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윤은 자본가가 생산자에게 선대한 재화와 장비의 가치 대비 순소득의 비율로 측정되는데, 이 비율은 결국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발생한 화폐의 흐름에서 노동이나 토지에 대비해 자본이 스스로에게 배분되는 몫을 획득하는 능력을 가리키고 이것은 다시 자본가-노동자-지주로 구성된 계급사회에서 자본가가 차지하는 지위에 대한 경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와는 달리 개인 간의 교환관계를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역시 경제적 계급을 정의한다. 경제적 계급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세 종류의 소득에 대응한다. 세 소득은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이고 이를 수취하는 계급은 각각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이다.

자본이 축적이 일어나기 전인, 경제발전의 원시단계에서는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을 혼자 전유했다. 사냥꾼이 하루 종일 숲 속에서 사냥하여 획득한 두 마리 사슴은 모두 사냥꾼의 몫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여 자본이 축적되고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변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사냥꾼이 하루 종일 숲 속을 헤매며 사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이나 사냥 장비를 축적한 사람이 자본가로서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식량이나 장비를 소유하지 못한 사냥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고용의사결정에 이어지는 자본가가 선대하는 재화와 장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자본가는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나 스스로 사냥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보유하지 못한 사냥꾼을 고용하고 식량과 장비를 대여하여 자신이 기획한 사냥을 수행하게 한다. 만약, 이 사냥꾼이 사냥에서 두 마리 사슴을 포획했다면, 자본가는 이 사슴 두 마리를 시장에서 처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에서 사냥꾼이 투입한 노동량에 비례하는 임금을 지불하고, 스스로의 몫으로는 1) 자신이 축적한 장비와 식량의 전체 가치에서 사냥꾼에게 식량과 장비를 대여하느라 감소된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와 2) 대여한 재화가 사냥에 기여한 대가에 해당하는 가치를 배분한다.

자본가가 사냥꾼에게 대여하여 사냥과정에서 소멸되는 재화의 가치에 상응하는 대가가 배분되지 않는다면, 장비와 식량을 축적한 자본가가 이를 사냥꾼에게 빌려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가는 빌려주는 재화와 장비의 가치에 비례하여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배분 받는 대가가 빌려주는 재화의 가치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면 자본가가 이들 재화와 장비를 대규모로 축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대여하는 재화와 장비의 가치에 비례하여 배분되는 대가가 바로 이윤이다.

사유재산제도의 정착으로 사냥이 이뤄지는 숲 역시 누군가의 소유물이므로, 사냥터인 숲을 소유한 지주도 숲의 이용료를 사냥꾼의 포획물 가치에서 배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의 양에 비례하는 임금이나 자본의 양에 비례하는 이윤과는 달리, 지대는 사냥이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숲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권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대의 크기는 투입되는 양에 비례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대 크기의 결정은 경제모델 내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밖에서 지주와 사냥을 기획한 자본가 간의 역관계에서 결정된다. 지주와 자본가의 역관계는 사냥의 결과물을 판매한 수익의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지대의 지위와 관련한 모순이 발견된다. , 지대 역시 임금, 이윤과 함께 생산물의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크기가 먼저 결정돼야 한다. 하지만, 지대의 크기 결정이 스미스 경우 경제모델 밖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지대의 크기는 오히려 가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대는 가격을 결정하는 변수라기 보다는 가격의 영향을 받는 변수다. 지대이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리카르도(David Ricardo)는 가격이 먼저 결정되고 지대의 크기는 가격에 의해 결정됨을 보여 지대와 관련된 스미스 이론에 내재한 모순을 해소했다.

사냥꾼이 포획한 사슴이라는 상품의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는 위에서 사슴 사냥으로 예시된 생산에 연관된 개인들이 분배 받는 소득이다. 따라서 한 경제 혹은 국가에서 생산되어 거래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합하면 그 결과는 다시 생산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로 환원될 수 있다. 스미스에게 있어 경제적 계급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경제주체 지위의 동질성과 각자의 지위로 인해 배분 받는 소득의 동질성으로 정의된다. 지대의 결정이 경제모델 외부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미스에게 있어 경제관계는 임금을 수취하는 노동자와 이윤을 수취하는 자본가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사항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Pi = Wi + Πi + Ri

상품 i의 가격은 생산 및 유통 과정에 참여한 노동에 대한 대가인 임금 Wi, 자본에 대한 대가인 이윤 Πi 그리고 토지에 대한 대가인 지대 Ri로 구성된다. 단순화를 위해 지대는 생략하고 임금과 이윤에만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임금과 이윤 모두 해당 투입요소인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에 비례한다.

Pi = li*w + ki*(r + 1)

liki는 각각 상품 i의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과 자본의 양이고 w r은 각각 임금율과 이윤율이다.

상품이 생산돼 시장에서 거래되기 위해서는 해당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기대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스미스는 이 정상적인 상황을 자연상태라고 불렀고 이 때 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정의했다. 자연가격은 자연 임금율이나 자연 이윤율에 따라 이뤄지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소득 배분을 지칭하는데 이 때 자연은 스콜라학파나 중농학파에서처럼 자연법같은 선험적으로 규정된 윤리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귀납적 추론에 따르거나 관습적인 의미에 따른 보통 혹은 통계적인 의미에서 평균의 수준을 의미한다. 자연 임금율은 노동자 계급이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임금 수준이고 자연 이윤율은 해당 생산부문에 다음 생산기간에도 동일한 양의 자본이 투자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자연가격은 해당 상품이 시장에서 실제로 거래되는 가격과는 차이가 있다. 스미스는 실제 거래가 이뤄지는 가격을 시장가격이라고 불렀는데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는 달리 수요와 공급의 영향을 반영한다.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 다른 것이 정상인데 장기적으로는 경쟁을 통한 자본의 부문간 이동을 통해 자연가격에 수렴한다. 스미스의 시장가격 결정은 깡티용-스미스 규칙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된다.

시장가격 = (수요자가 계산한 수요량 * 수요자가 예측한 자연가격)/공급자가 시장에 공급한 양

위의 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장가격은 화폐단위로 표시된다. 스미스에 의하면 화폐는 생산된 상품이거나 혹은 상품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화폐는 자연가격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에 참여하는 경제적 계급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자연상태의 소득배분을 나타내는 자연가격에 변화가 생긴 경우, 자연가격의 변화분과 화폐의 생산량이나 생산조건의 변동으로 인한 변화분을 구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을 다른 상품으로 측정할 경우, 화폐와 관련하여 언급했던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생산조건이 변하지 않는 가격측정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스미스뿐만 아니라 리카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의 큰 과제가 됐다. 스미스가 발견한 기준은 바로 노동이다. 스미스가 노동을 가격측정의 기준으로 채택한 것은 노동이 유일한 생산요소라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정량의 노동은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서 노동자에게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근거해 노동,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배 노동을 기준으로 선정했다. , 통상적인 건강상태에서 숙련도나 능력에 따라 노동자가 노동을 한다는 것은 그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휴식, 자유, 육체적 평안함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한 휴식 등이 노동에 대한 보수로 임금을 얼마나 받는 것에 상관없이, 노동자가 치르는 노동의 가치다. 스미스에 의하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노동의 보수는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이것은 노동과 교환되는 곡물과 같은 상품의 가치가 변하는 것이지 지배노동의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지배노동은 항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지배노동을 통해 측정된 상품의 가치는 해당 상품의 실질가격이 된다. 자연가격내지 실질가격을 측정해 보자. 먼저 지배노동을 단위로 측정된 자연 임금률을 계산해보자. 임금률은 하루처럼 일정 단위기간 동안 진행된 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실질가격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실질가격을 지불하면 단위노동을 살 수 있거나, 혹은, 이를 스미스가 사용한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임금률을 지배노동 단위로 표현하면 항상 1이다. 이렇게 결정된 임금률을 자연 임금률로 쉽게 변경할 수 있다. 즉 노동자 혹은 그의 가족이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양의 재화를 1단위의 지배노동이 구입 혹은 지배할 수 있도록 정하면 된다. 가격측정의 척도가 되는 1단위의 지배노동과 교환되는 재화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 밖에서 이뤄진다.

가격 Pi , 생산물 i가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은 Wi, , 노동에게 배분되는 소득과 Πi, 즉 자본에게 배분되는 소득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Wi li * w, , 생산물 i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의 양에 임금률을 곱해 구할 수 있는데, 임금률, w의 값이 1이므로 지배노동으로 측정된, 노동에 배분되는 소득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의 양과 같아진다.

생산물 i, 지배노동으로 측정되는 가격을 구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것은 자본에게 배분되는 소득부분 Πi ki*(r + 1) 혹은 이윤율 r을 결정하는 것이다. 위의 식으로 표현하면,

Πi = pi - li.

이제 자본가가 투입하는 자본의 양이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양과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 ki = Wi = li * w = li. 이를 위의 식에 대입하여 이윤율 r을 구하면,

r = (pi - li)/li - 1

이 식에 따르면 이윤율의 크기는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량뿐만 아니라 해당 상품이 지배하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이윤율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윤은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임금의 크기와 함께 이윤의 크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윤의 크기와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순환논리가 존재한다. 이 순환논리로 인해, 스미스 이론의 틀에서는 이윤은 물론 가격도 결정할 수 없다.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가격 및 분배이론 실패의 원인은 지배노동 가치설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펴 본 것처럼 지배노동 가치설은 재화의 교환가치를 특정 교환, , 노동과의 교환 비율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이윤의 크기를 설명할 수 없다.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 근거한 이윤 개념 등을 감안할 때, 아담 스미스는 노동자-자본가-지주 계급으로 구성된 계급사회에 적합한 이론체계를 수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배노동 가치설에 기초를 둔 자연가격 이론을 통해 가격과 이윤의 크기를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스미스의 체계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1)     지배노동가치설을 포기하여 교환과정에서 벗어나, 생산과정에서 직접 가격을 구하여 이를 통해 이윤을 구하거나

2)     생산과정에서 직접 이윤율을 구하여 이를 이용하여 가격을 구하는 것이다.

 

by invisibleman 2013. 6. 2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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