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태위기 시대, 화폐와 회계의 역할을 다시 묻는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자연을 돈으로 계산하려는 시도도 늘어난다. 탄소에는 가격이 붙고, 환경파괴는 비용으로 계산되며, 기업과 금융기관은 기후위험과 생물다양성 훼손을 투자와 신용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연을 공짜라고 가정했던 시대와 비교하면 분명 중요한 변화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 자연에 적절한 가격을 붙이면 우리의 책임은 끝나는가.

숲을 훼손한 기업이 충분한 돈을 지급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기업은 숲에 대한 의무를 모두 이행한 것일까. 습지가 파괴되었지만 다른 곳에 새로운 습지를 조성할 비용을 냈다면 두 자연은 서로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어떤 생물종이나 생태계의 파괴도 충분한 금액만 지불하면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생태위기를 단순한 환경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의 문제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2. 성장의 문제에서 관계의 문제로

최근의 탈성장 논의는 이 문제를 상당히 급진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사이토 고헤이는 기후위기의 원인을 막연한 인류의 탐욕이 아니라 끊임없는 가치증식을 요구하는 자본의 축적동학에서 찾는다.

자연에는 고유한 재생산의 시간과 한계가 있다. 숲이 자라고 토양이 회복되고 생태계가 유지되는 데에는 인간의 경제가 마음대로 단축할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본은 지속적인 확대를 요구한다. 이 둘의 충돌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성장은 단순히 경제규모를 줄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 얼마나 생산할 것인가를 자본의 자기증식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공동의 부, 생태적 재생산의 조건에 맞게 다시 결정하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질문 하나가 남는다. 자연의 한계를 존중할 것인지 판단하고,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지 결정하며, 자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숙의하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렇다면 강과 숲, 토양과 동물, 생태계는 결국 인간이 잘 관리해야 할 대상일 뿐인가. 아니면 인간과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를 구성하는 존재인가.

이 지점에서 생산양식의 문제는 존재양식의 문제와 만난다.

3. 자연은 인간 사회의 에 있는가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연과 사회의 구분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가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근대 서구의 세계관은 인간에게만 주체성과 내면성을 집중시키고 비인간 자연을 인간의 이용 및 관리의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관계 맺는 유일한 방식이 아니다. 데스콜라는 자연을 인간 사회의 바깥에 놓은 객체로 보는 대신, 인간과 함께 관계의 질서를 구성하는 존재로 보고 그에 맞는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브뤼노 라투르는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한다.

기후, , , 생태계와 같은 존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변화하고 다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들의 존속과 재생산 조건은 정치 결정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을까.

비인간 존재는 의회에 출석해 자신의 주장을 말할 수 없다. 결국 과학자, 전문가, 시민단체, 공공기관 같은 인간이 그것을 대신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연을 대표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대표하는지 계속 확인하고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스콜라와 라투르는 바로 이 점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한다. 데스콜라가 인간과 비인간이 어떤 존재로 식별되고 어떤 관계를 통해 질서를 구성하는지 묻는다면, 라투르는 그렇게 등장한 존재의 이해관계를 누가 대표하며 그 대표를 어떻게 검증하고 수정할 것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철학과 정치가 여기까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현실의 경제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4. 철학이 바뀌어도 대차대조표가 그대로라면

어떤 사회가 숲은 단순한 목재의 집합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고 하자. 은행의 대출기준과 기업의 회계장부가 그대로라면 실제 경제행위는 얼마나 달라질까.

기업은 여전히 수익과 비용을 계산한다. 은행은 어떤 사업에 신용을 공급할 것인지 결정한다. 회계는 무엇을 자산으로 인정하고 무엇을 비용이나 부채로 기록할 것인지 규정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려면 가치관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관계를 반복적으로 작동하는 제도적 의무로 번역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서 화폐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미셸 아글리에타 등이 전개한 프랑스 제도주의 화폐론은 화폐를 단순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기록하는 제도로 본다.

이 관점에서 부채는 특히 흥미롭다.

부채에는 과거의 관계에서 발생한 의무를 현재에 남겨놓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은 이미 끝났지만 그 사건에서 발생한 의무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생태부채라는 개념을 새롭게 읽을 가능성이 생긴다. 생태부채는 원래 환경정의와 선진국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논의에서 발전해온 개념이다. 이를 일반화해, 자연과의 관계에서 생긴 의무를 어떻게 시간 속에서 지속시킬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읽어보고자 한다.

5. 돈을 냈다고 생태부채가 사라지는가

일반적인 금융채무는 돈을 갚으면 끝난다. 1억원을 빌렸다면 원리금을 상환함으로써 채권·채무관계는 소멸한다.

그러나 생태적 관계는 다르다.

토양을 훼손했다고 해서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면 건강한 토양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숲과 물, 기후와 생물다양성은 인간 사회가 계속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그 조건에 의존하는 한 그것을 유지하고 복원해야 할 의무도 계속된다.

따라서 생태부채는 언젠가 청산해야 할 빚이라기보다 계속 이행해야 할 의무에 가깝다.

생태부채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기존의 금융부채와 구별된다. 생태적 훼손의 효과는 현재와 미래에 계속될 수 있으며, 그 결과 유지와 복원의 의무 역시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환경정책의 질문도 달라진다.

가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환경정책의 한 가지 질문이 환경파괴의 적절한 가격은 얼마인가?”였다면 여기서 제안하는 질문은 어떤 생태적 조건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며, 그 조건을 유지할 의무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가격이 파괴와 보상의 허용 범위를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 되기 쉽다. 가격이 충분하다면 파괴와 보상을 교환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질문에서는 일정한 생태적 한계가 먼저 정해지고, 가격은 그 한계를 지키기 위한 책임을 배분하는 도구가 된다.

7. 자연을 지킨 뒤 이익을 계산한다면

기업회계에서도 같은 사고의 전환이 가능하다.

CARE-TDL(Comprehensive Accounting in Respect of Ecology-Triple Depreciation Line)이라는 회계모델은 기존 회계에서 재무적 자본을 유지하는 원리를 인적·자연 자본의 유지로 확대하려 한다. 핵심은 자연 전체의 진짜 가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과 자연의 재생산 조건을 유지하고 복원하는 비용을 기업이 부담해야 할 선행적 의무로 보는 데 있다.

기존의 사고에서는 먼저 기업의 이익을 계산한 뒤 환경보호에 얼마를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기 쉽다.

하지만 순서를 바꾼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생태적 재생산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먼저 부담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이 기업의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다.

환경보호가 이윤이 충분할 때 선택적으로 하는 좋은 일에서 기업 활동의 성립조건 자체로 바뀌기 때문이다. CARE-TDL의 정치경제적 의미 역시 자연에 가격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고 유지와 복원을 기업의 선택적 사회공헌비용이 아닌 기업활동에 내재한 의무로 바꾸는 데 있다.

8. 화폐를 버리지 않으면서 화폐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

그러나 여기서 위험한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생태적 의무를 화폐와 회계로 표현하기 시작하면 모든 자연을 하나의 숫자로 바꾸려는 유혹이 생긴다.

숲도 100억원, 습지도 50억원, 멸종위기종도 얼마 하는 식이다.

그렇게 되면 생태부채는 오히려 얼마를 내면 파괴해도 되는가를 계산해주는 제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적 가치평가보다 앞서는 경계가 필요하다.

일부 생태적 조건은 가격에 따라 다른 자산으로 자유롭게 대체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한다. 일정한 생물물리학적 한계는 비용편익분석에서 협상할 숫자가 아니라 경제활동이 먼저 준수해야 할 제약이어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화폐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화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화폐는 생태적 한계를 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한계 안에서 누가 어느 정도의 유지와 복원 의무를 부담할지 배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10. ‘존재-통화적 인프라라는 제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서 경제가 저절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관계가 실제 경제에서 작동하려면 자연에 대한 의무가 기억되고, 이어지고, 지켜지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나는 이런 제도적 틀을 존재-통화적 인프라(onto-monetary infrastructure)’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화폐신용회계의 경제제도와 연결하는 틀이다.

과거에 발생한 생태적 의무를 부채와 회계가 기억한다. 기업이나 세대가 바뀌더라도 그 의무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른 주체와 미래로 이어지게 한다. 그리고 신용·회계·거버넌스를 통해 그 의무가 실제 투자와 생산의 선택을 구속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두 가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첫째는 비대체성이다. 생태적 존재와 관계는 다른 자산이나 돈으로 완전히 대신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둘째는 대표와 검증이다. 비인간 존재를 대신해 말하는 인간의 판단이 언제나 옳다고 전제하지 않고 새로운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 논쟁, 변화된 생태적 영향을 통해 계속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존재-통화적 인프라는 생태 의무를 기억하고, 대물림하며, 강제하는세 가지 기능과 자연을 돈으로 완전히 대체하지 못하게 막고, 자연을 대신해 말하는 인간의 판단을 끊임없이 검증하는두 가지 안전장치가 결합된, 생태위기시대에 부합하는 경제질서구축을 위한 틀이다.

11. 우리는 자연의 가격을 묻고 있는가, 우리의 의무를 묻고 있는가

생태위기 시대에도 가격은 필요하다. 탄소배출을 줄이고 복원비용을 배분하며 투자의 방향을 바꾸려면 화폐와 회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가격을 지불하면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돈을 지불했다고 숲을 파괴할 권리가 생기는가. 다른 자연자본을 만들었다고 멸종된 종을 대체할 수 있는가. 복원비용을 지급했다고 자연에 대한 의무가 끝나는가.

생태위기 시대의 경제가 물어야 할 것은 자연의 정확한 가격이 아니다. 어떤 자연은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지, 자연에 대한 어떤 의무는 돈을 내도 끝나지 않는지, 그리고 그 의무를 기업의 회계장부와 은행의 신용배분, 국가의 정책 속에 어떻게 남겨둘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자연의 가격을 계산하는 경제에서 자연에 대한 의무를 기억하는 경제로.

생태적 전환은 아마 이 질문의 변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by invisibleman 2026. 8. 31. 14:06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데이비드 웬그로(David Wengrow)  모든 것의 새벽4자유로운 인간, 문화의 기원, 사유재산의 등장에서, 동물의 물질대사는 필요한 것만 생산하는 것에 비해, ‘과잉의 생물로서 인간의 물질대사 즉 노동은 예외 없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데, 이러한 잉여 창출 잠재력이 특정 사회구조와 결합될 때 인간을 모든 생물 종 가운데에서 가장 자연 파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그레이버와 웬그로의 기술은 모든 것의 새벽,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시된 이후 아담 스미스뿐 아니라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미친, 농업 혁명을 인간 사회 내 수직적인 위계 질서 도입의 계기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는 책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 농경을 통해 토지, 가축 등 생산 수단이 발전하고 잉여 곡물이 축적되면서 이를 전유하기 위해 전업 전사, 사제, 관료 같은 엘리트 계급이 등장해 지배와 피지배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 그리고 국가가 발생했다는 관점에 저자들은 반대합니다. 모든 것의 새벽의 두 저자는 불평등의 기원을 농업 혁명에서 찾는 대신, 잉여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존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를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 ‘과잉의 생물이라는 인간의 정의에는 잉여를 생산함으로써 인류는 예술, 문화, 거대 기념물 등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고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을 창조할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잉여의 가장 큰 몫을 전유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사회적·¸대사적 구조를 잉여생산 위주로 조작해온 인간 사회의 역사적 특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반복하지면, 인간을 과잉의 생물로 기술한 저자들의 주장은, 잉여는 인류가 수렵채집생활에서 농업 생산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한 결과물이 아니라, 잉여를 전유하기 위해 잉여생산에 맞춰 생산관계을 조절해온 인류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량을 보존하거나 축적하지 않고 당일이나 익일에 소비하는 즉각적 보상(immediate return)’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물질적 잉여를 남기지 않고 평등한 수렵채집 사회를 유지하는 아프리카의 하드자(Hadza) 족을 연구한 인류학자 우드번(James Woodburn)을 인용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생태 환경과 맺는 관계는 역사적 또는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 스스로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와 경제체제의 유형에 의해 조건지어 집니다.

도구 사용 능력, 사회적 분업 구조를 갖춘 사회를 구성하는 능력 등을 감안할 때, 인간이 잉여를 생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레이버와 웬그로를 따라 인간을 과잉의 생물로 규정하는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그 잉여를 독점하기 위해 사회와 생태 환경의 물질적 대사 관계, 사회 구성원 간의 생산관계를 조직하면서, 인간은 연장자나 지도자의 명령을 거부할 자유, 집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단을 떠날 자유, 개별 경제주체의 자율성 그리고 생태 환경과 맺는 상호 부조적 관계를 모두 상실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by invisibleman 2026. 7. 31. 23:00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에서 저자 사이토 고헤이는 현대 인류가 처한 위기를 규정하는, 불평등 문제와 기후 위기를 자본주의가 상품으로 변환한 결과로서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본 1뿐만 아니라 파리코뮌 이후의 원고 등을 토대로 노년의 마르크스가 구상한,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회는 탈성장 코뮤니즘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탈성장 코뮤니즘에서 상품이 다시 부로 전환하면,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가가 가져온 풍요를 모든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토대로 두고 생산자들이, 맹목적인 자본의 힘에 지배당하는 대신, 공통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합하고 협동함으로써, 부를 생산하는 과정을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형태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적 제어 아래 둘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사이토 고헤이는 인간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행위라는 노동의 정의로부터 부와 상품을 대립시키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물질대사로서 노동

물질대사는 생체에 들어온 물질이 다양한 화학변화를 거쳐 다른 물질이 되어 체외로 배출되는 과정입니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물체는 생존하려면 물질대사를 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인간의 생활에서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는 달리, 물질대사를 명확한 목적을 갖고 의식적인 노동, 구상과 실행의 양 측면을 갖춘 노동으로 수행한다고 합니다.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합목적적인 활동이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연물의 취득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보편적 조건이자 인간 생활의 영원한 자연조건이고 따라서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형태에 똑같이 공통된 것이다”.(자본 1, 5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1절 노동과정 p. 273)

노동은 우선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즉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통제하는 한 과정이다”(자본 1, 5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1절 노동과정 p. 265-266)

따라서 인간이 의식적인 노동으로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결과로, 인간의 삶, 문화, 사회 그리고 자연 환경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사이토 고헤이는 인간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호 협력해 노동을 자연에 작용함으로써 부를 형성해 왔다고 합니다. 부유한 사회는 개별 구성원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풍부하게 창출되고 유지발전되는 공동체입니다. , 부는 노동의 결과물입니다. 사이토 고헤이는 윌리엄 모리스를 인용해 부를 다음 인용처럼 기술합니다.

부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며 도리를 아는 인간이 도리에 맞는 용도를 위해 자연의 은혜 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햇빛, 신선한 공기, 훼손되지 않은 땅, 음식, 필요하고 보기 흉하지 않은 의복과 주거, 모든 종류의 지식 축적과 그것을 전파하는 힘, 인간과 인간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수단, 예술 작품, 인간이 가장 인간적이고 향상심에 불타고 가장 사려 깊을 때 창조하는 아름다움, 즉 자유롭고 인간적이고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즐거움, 이를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부이다”. (시로시타 마치코, 의미 있는 노동과 무의미한 노고, 소박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하여, p. 150,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6장에서 재인용)

모리스에 의하면, 부를 창출하고 향유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가 자연과 그리고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고, 유지관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인 것입니다. 상호관계 속에서 우리우리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와의 관계에서 자연은 은혜를 베푸는 주체입니다. 인간 간 상호 은혜와 자연의 은혜인 부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도리를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모리스의 '우리', 노동으로 창출된 부를 향유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인간존재는 이용 혹은 노동의 대상으로서 '우리' 혹은 사회의 밖에 존재합니다. 환경 위기를 통해 우리는, 자연에서 부를 창출하는 인간의 행위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자연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근대 인간이 비인간존재를 'collect'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환경위기에 대응하는 데는 작지 않은 도움이 되겠지만, 전근대사회에서 인간이 비인간존재와 맺던 상호관계의 풍부한 내용을 여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잡본론 일기'라는 경제학의 범주 때문에, ''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를 생산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주기-받기-되돌려주기'의 상호관계에 토대를 둔 공동체를 새로운 경제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어떨까요?

2. 자본주의와 부의 상품으로 변환

하지만, 자본주의는 부를 상품으로 변환합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부는 하나의 거대한 상품 집적으로 나타나고 하나하나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에서 시작한다”. (자본 I, 1장 상품, 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실체·가치크기), p. 87)

부가 상품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원시적 축적은, 자연과의 물질대사가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공유지에 공동체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접근 및 이용을 불허하는 폭력적인 과정입니다. 원시적 축적의 결과, 공유지가 제공하던, 자연과의 물질대사 결과물은 더 이상 부가 아니라 상품으로 변환되었으며 공유지에 대한 접근권을 박탈당한, 공유지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생존을 유지하려면 자연과 직접적인 물질대사 대신, 노동력을 팔아, 상품으로 변환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공유지의 소별과 함께 공동체도 소멸됐습니다. 대신, 개인과 시장이 그 자리를 물려 받았습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즉 노동이 그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부를 생산하는 것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은 가치를 생산함으로써 자본의 자기증식을 실현하는 것으로 소외되어 버렸습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더 이상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는 현상을 마르크스는 상품의 물상화라고 불렀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끊임없이 가치를 증가시키면서 자기 증식하는 운동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운동을 G-W-G’로 표시했습니다. 이 표시에 의하면, 자본이란 돈 버는 운동이고 이 돈 버는 운동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것이 제1의 목표가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 운동식 G-W-G’에서 상품과 화폐는 모두 가치 자체의 다른 실존 양식으로 기능할 뿐입니다. 가치는 이 운동 속에서 손실되지 않고 끊임없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하며 이렇게 해서 하나의 자동적 주체로 전환됩니다. 가치는 자본 운동 과정의 주체가 되며 이 과정에서 화폐와 상품으로 끊임없이 형태를 변환합니다. 이렇게 자동화된 자본의 운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 인간도 자연도 그 운동에 종속되어 자본에 이용당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는 크게 교란됩니다.

G-W-G’로 표시되는 자본의 운동에서 GG’의 차이는 가치의 증식이기도 하지만 화폐의 증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치에서 화폐를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가치형태론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면서, 자본의 운동은 가치와는 독립된 화폐의 운동으로 해석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주류는 가치론을 토대로 화폐를 설명하려고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어떤 경제학자도 충분한 설득력을 갖춘 결과물을 산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치론을 버려야 할 로도스섬이 바로 여기일 수도 있셌습니다.

3. 가치와 노동

마르크스에 의하면, 가치는 생산 과정에서만 증가합니다. 노동자로부터 구입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사용하면, 노동자는 노동력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이 노동이 가치를 창출합니다. 달리 설명하면, 노동력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가진 노동자는 자본가와 평등한 위치에서 노동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를 통해, 노동계약에 표시된 일정 가격을 대가로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이미 자본가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함으로써, 노동에 적용할 노동 방식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습니다. , 자본가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을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생산과정에 투입된 노동이 가치를 창출합니다. 자본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시장 거래의 측면에서, 상품의 등가교환 원칙은 노동력 상품과 임금의 교환에서도 제대로 지켜집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노동을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전유함으로써 잉여가치의 착취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치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실행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믿고 그것을 어디에 팔지도 스스로 결정하며 필사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유로운 자기결정, 즉 자유에 대한 의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감정은 노동자를 노예보다 훨씬 더 나은 생산자로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가 임의로 배정한 작업 현장에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노동자에게 생깁니다. 자기 책임감을 갖고 임하는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좋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실수하면 자신을 탓합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몰아세웁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본가에게 유리한 사고방식을 노동자가 스스로 내면화함으로써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노동력은 인간이 지닌 능력으로 본래 사회의 부 중 하나입니다. 노동력이라는 부를,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 꿈을 실현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고 일하는 사람에게 행복감과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에 가둬 버립니다. 그로 인래 노동 속에 존재하던 인간, 비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공동체를 해체시켜 버렸습니다.

자본론 출간 이후 자본가들이 극대화를 추구하는 가치가 노동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 생산을 위해 소모되는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가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노동자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유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 번째 자유는 강제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농공상이나 카스트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와는 달리 우리는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자유는 생산수단에서도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생산수단에서 자유롭다란 생존에 필요한 것을 생산할 수단을 가지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이 상태는 공동체와 공유지가 울타리 치기에 의해 해체된 원시적 축적의 결과입니다. 생산수단에서 분리되면서, 공동체와 생산수단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을 전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팔아 상품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유롭습니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라는 부를 해체하고 사람들을 공동체의 굴레에서 해방했습니다. 공동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그곳에 있던 상호부조, 도움의 관계에서도 자유롭다는 것, 즉 단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무도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생존 위험에 항상 노출된 노동자는 모두 잠재적 빈민이라고 마르크스는 말했습니다.

끝없는 가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이해관계와 인간다운 삶을 원하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고 자발적인 노동자는 자본가가 원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이 지향해야 할 모습, 인간적으로 우수한 모습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적 책임감, 향상심, 주체성이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다고 마르크스는 경고했습니다.

자본가의 목적은 노동력이라는 부를 상품으로 가둬 두는 것입니다. 상품으로 가둬 둔다는 것은 자유 시간을 빼앗는다는 의미입니다. 임금인상에 따른 장시간 노동이 임금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노동일을 무제한으로 만들면 상품의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자본가들의 사업 기회가 확대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일 단축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부를 되찾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풍요로운 삶이라는 부를 지키려면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거나 자신이 지닌 노동력 중 상품으로 판매하는 영역을 제한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것이 노동일의 제한입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지키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노동력과 인생의 시간이라는 부가 상품으로 소모되지 않도록 제한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노동력을 상품으로 가둬 두려는 자본가를 상대로 혼자서 싸워 봤자 승산이 없습니다.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어소시에이션, 자발적 결사) 교섭을 벌이기 위해서는 동료들과 함께 모여서 토론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은 불가결합니다.

4. 혁신과 노동일

케인스는 1930년 에세이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기술 발전과 생산력 향상으로 인해 2030년에는 인류가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충분한 경제적 풍요를 누릴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2030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주당 4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합니다. 케인즈의 예상과는 달리 왜 생산력 상승이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하지도 않았고 행복하게 해 주지도 않았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는 열쇠는 애초 자본주의에서 왜 이렇게 생산력이 올라가는지, 다시 말해 왜 자본가는 생산력을 높이려고 하는지에 있습니다.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고 그럼으로써 노동자 자체의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노동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은 자본의 내재적 충동이자 끊임없이 지속되는 경향이다”(자본 I 10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 p. 446)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합니다. 하루 일한 노동자는 다음 날도 일할 수 있도록 먹고 자는 것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노동력의 재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은 결국 노동자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런 배경에서 마르크스는 8시간인 노동일을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필요노동시간과 잉여가치가 창출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노동일의 절대 길이가 연장됨으로써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 자체가 증가하는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노동력 가치의 저하로 발생하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구별했습니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에서는 노동일의 길이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생산되는 가치의 합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가치가 낮아지면 그만큼 필요노동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나 동일한 노동일에서 자본가의 몫인 잉여가치는 늘어납니다.

상기한 인용문에 있는, 노동생산력 증대를 통해 노동자가 싸진다는 것은 노동일의 크기에 변화가 없더라도, 노동력 재생산에 소요되는 필요노동시간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그만큼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자본가로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자본가보다 더 싸게, 더 효율적으로 생산해서 자본의 가치 증식을 실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생산성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 결과, 경제 전체적으로 다양한 기술혁신이 일어납니다. 개별 자본가가 사회적 평균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구현하는 새로운 생산 기술이나 방식을 먼저 도입했을 때 얻는 일시적 초과이윤을 마르크스는 특별잉여가치라고 명명했는데, 특별잉여가치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하려는 개별 자본가들의 혁신 기술은 살아남으려는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평균적인 기술로 전락하고 특별잉여가치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기술 혁신의 덕분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증가해 상대적 잉여가치가 증가합니다.

결과적으로, 기술 발전과 생산력 향상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의 감축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5. 노동 지배 1: 구상과 실행의 분리

2030년에는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이 될 것이라는 케인스의 예상이 빗나간 또 다른 이유는 생산력을 높이는 기술혁신을 통해, 자본가들은 가치의 증식만이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지배 강화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는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포섭되어 자율성을 잃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생산력 증가를 통한 자본의 노동자 지배는, 본래 구상과 실행,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통합된 인간의 노동이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구상 측면과 실행 측면, 혹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어, 구상은 자본가나 자본가에게 고용된 현장감독이 독점하고 노동자는 실행만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이전에 생산 부문에서 두드러졌던 길드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길드가 지배적이었던 전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장인들은 자신들의 구상력과 실행력을 자율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과당경쟁을 막고 자신의 일과 노동환경을 지켜 냈습니다. 길드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존재하더라도, 구상과 실행이 통일된 노동자의 기술과 통찰력에 자본가가 의존하는 상태였습니다.

자본주의는 길드를 철저하게 해체해 나가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의 구상과 실행의 분리입니다. 구상과 실행을 분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여 노동자들에게 분업을 시키는 것입니다. 직인이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하는 작업을 획일적인 단순 작업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분업을 통해 획일화된 공정을 만들어 가면서 생산효율이 높아집니다. 단순 작업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력을 늘리고 생산 규모를 점점 더 확대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확산하면서 가격경쟁의 물결에 휩쓸려 길드는 해체되어 갔습니다. 장사가 안되는 직인들은 폐업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본가들의 분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길드의 힘은 약해지고 그만큼 자본가의 힘은 강해졌습니다.

생산공정의 분업화와 그에 따른 생산력의 향상으로 가난해지는 사람에는 직인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은 비숙련공들도 포함됐습니다, 그들은 자본가들이 구축한 분업 시스템에 편입되어 육체노동을 실행할 뿐, 구상할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공장에서는 정해진 부분 작업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지식과 통찰력을 쌓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시장의 흐름에 따라 일의 내용은 계속 바뀌게 될 것입니다. 단순노동은 대체가 쉽습니다. 실행 측면에서도 과거 직인처럼 풍부한 경험을 쌓고 기술을 익히는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꽃피울 수 없습니다.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무언가를 만드는 생산능력마저 잃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갈파했습니다.

노동의 두 측면인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과학적 관리를 내세우는 테일러주의는 생산에 관한 노동자들의 지식이라는 코먼(공유재산)에 울타리 치는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과 노하우를 자본이 독점하고 자본의 편익에 따라 재구성된 생산시스템에 노동자를 강제로 복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져 실적 상승의 혜택을 노동자들도 임금인상이라는 형태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조 측도 자본에 구상을 빼앗기는 것을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고도 경제성장 시대가 끝나면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에게 그런 덤을 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입지는 점점 약해지고 임금도 낮아지고 노동시간도 쉽게 연장됩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면서 노동자의 자율성도 인간다운 풍요로운 시간도 사정없이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케인스가 예견한 여가사회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노동자는 구상하는 힘을 잃고 일터에서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됩니다. 단순 작업에 갇히면서 인간의 노동은 본래 지닌 기능으로서의 부라는 측면이 점점 더 빈약해집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살아 있는 노동으로서 죽은 노동인 기계에 투입되어 기계의 부속물이 됩니다. 예전에는 인간이 도구를 사용했지만 대공업 생산 현장에서는 인간이 기계를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기계라는 사물과 노동자의 입장이 역전, 전복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바로 생산과정의 물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 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기계이고 기계는 살아 있는 노동력을 지배하고 빨아들이는 죽은 노동이 됩니다. 기계는 노동을 내용에서 해방합니다. 노동의 내용에서 해방하는 것은 기계로 인해 노동자는 내용 없는 단순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내용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기쁨도, 성취감도, 충실감도 없는, 한마디로 소외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없으니 언제 누구와도 대체가 가능하고 노동자의 힘은 점점 약화되는 것입니다.

자본의 지배가 완성되면, 마르크스에 의하면, 비약적으로 향상된 생산력도 모두 자본가의 것으로 나타납니다,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수행한 노동이 생산력을 높였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자율적으로 협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노동자의 생산력으로 나타나지 않고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납니다.

자본의 지배 하에서 노동자는 무력한 소비자가 됩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자신의 시간을 돈벌이에 사용하고 그 외의 일은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인 일로 여겨 아웃소싱합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거기서 기회를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이로 인해, 노동자는 오히려 스스로 요리도 할 수 없고 청소도 할 수 없는 타인의 돌봄노동에 깊이 의존하는 존재로 변환합니다. 시장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하는 무력한 소비자가 된 것입니다. 무력한 소비자는, 돈이 있더라도, 원하는 메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있지만 메뉴에 없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매우 약하고 자유롭지 못한 존재입니다.

6. 노동지배 2: 상대적 과잉인구

또 다른 형태의 자본의 노동 지배는, 노동시장에서 자본의 노동 수요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잉한 노동자가 넘쳐 나면서 매수 우위의 상황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한편으로 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에 새로운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고, 이 경향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는 방식으로 노동 양식 자체와 사회적 노동 유기체의 성격을 변화시킵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 중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을 편입시키고 또는 기계가 쫓아낸 노동자들을 일 없게 만듦으로써 과잉인구를 만들어냈습니다. 기계가 육체노동을 대신하게 되면 비숙련 노동자뿐 아니라 여성과 어린이 등 이전에 자본의 손이 닿지 않던 계층도 일할 수 있게 됩니다.

농업의 공업화는 농촌에 과잉인구를 만들어 많은 젊은이가 도시로 향하게 됩니다. 이들을 노동시장에 편입시키면 상대적 과잉인구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공장 밖에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 더 열악한 노동조건에서도 일하겠다, 어쨌든 일하게 해 달라는 사람이 늘어나면 공장 안의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오래 더 성실하게 일하게 됩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일할수록 생산력이 높아져 자본가들이 채용 인력 규모를 줄이게 되어 상대적 과잉인구는 더 증가하고 맙니다. , 노동자 계급 중 취업자들의 과도 노동은 산업예비군 대열을 팽창시키는 반면 산업예비군이 경쟁을 통해 취업자들에게 가하는 압박의 강화로 취업자는 과도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실업자와 취업자의 분열을 낳고 단결할 수 없는 노동자는 자본 앞에서 더욱더 힘이 약해집니다. 힘이 약해지면 저항할 수 없게 되고 더 많은 과도 노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현대의 노동자들은 단순히 근면한 것뿐 아니라 경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강제되고 있습니다. , 경영자나 관리자가 구상한 이념이나 매뉴얼에 따라, 즉 그들의 입장과 의도를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구상이란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패스트패션 매장의 점장이 자유롭게 타사 화장품이나 신발을 들여와 판매하거나 영업시간, 고객 응대 방식을 바꾸는 것이 구상입니다. 그래서 그런 재량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 경영자의 입장에서 일한다면 현대의 노동자는 여전히 실행만 하고 있을 뿐 구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문제는 구상과 실행이 분리되어 자본의 지배 아래 사람들의 노동이 무내용화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맞서 인간의 노동이라는 풍부한 부를 회복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뿐 아니라 보람 있고 풍요롭고 매력적인 노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상상하는 미래 사회의 노동자는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입니다. 그는 구상과 실행 모두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부를 활용하면서 사회 전체의 부를 풍요롭게 만들고 자연적 존재의 부에 적응해 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지지하면서 자율적으로 살아갈 능력과 감수성을 되찾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소외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습니다.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진정한 혁신에 필요한 것이 소외 극복입니다. 자본의 전제와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자율성과 풍요를 되찾는 노동의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합니다.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연에서의 소외도 극복해야 합니다.

7. 새로운 사회 시스템

사적 소유 확대와 이윤추구를 위해 생태계에 대한 약탈을 반복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지구환경을 지속가능한 형태로 관리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방치하면 사회의 부도, 자연의 부도 약탈하고 파괴해 버립니다. 그 현상이 현대의 불평등 문제이며 기후 위기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지구 거주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질곡이 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본질적 특징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이행하려면 사적 소유를 폐기해야 한다는 사고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뿌리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 기타 개발독재 국가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추진하더라도 국유화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상기한 국가들은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희생시키며 국유화와 근대화를 추진했을 뿐입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지향하더라도 국유화라면, 자본의 축적은 멈추지 않고 지속돼 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시장에서는 대량의 상품이 계속 화폐를 이용해 거래될 것입니다. 또 관료의 지배로 인해 민주주의가 부정되고 국가권력이 폭주할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국유화를 통한 사적 소유의 철폐가 아니라, 착취 없는 자유로운 노동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국유화로 이행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은 정치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경제문제를 노동자들 스스로 변화시키지 않고 국가나 정치권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사회주의 특징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의 특징입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물상화를 통해 상품과 화폐가 인간을 지배하는 듯한 힘을 휘두르는 현실입니다. 자본주의 물상화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나 정치체제의 변혁이 아니라 상품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일상에서 선택의 여지를 넓혀 가는 것입니다. , 생활에 필요한 재화(주거, 공원)와 서비스(교육, 의료, 대중교통)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을수록 탈상품화를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재화와 서비스는 필요한 사람에게 시장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고 의료나 교육 등의 형태로 직접 현물급부되어야 합니다.

재화와 서비스의 현물급부만으로는 국유화를 통해 수립된 국가자본주의 국가와 복지국가를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국유화를 통한 국가자본주의 국가와는 달리, 복지국가에서는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의 중요성은 복지국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서비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업보험 같은 사회보험이나 연금부터 공공도서관, 공공의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발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노동조합, 이웃 상호부조 조직, 협동조합 등의 실천이 있습니다. 자본의 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지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상호부조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어소시에이션 운동은 국유화를 당과 관료가 추진했던 국가자본주의와는 순서가 반대입니다. 보편적 서비스로서 국유화는 어소시에이션이 발전한 다음에 이루어졌습니다.

물상화와 탈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지국가는 마르크스가 생각한 비전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국가보다 자본주의 복지국가가 마르크스의 생각에 더 가깝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을 놓지 않았습니다. 복지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복지국가의 관료지배와 비효율입니다. 이 문제는, 북지국가가 어소시에이션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를 국가에서 제공하면서 관료제는 점점 커져 가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국민들도 어소시에이션에 자각적으로 참여하던 상태에서 대형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맡기고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공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로 변해갔습니다. 게다가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소시에이션의 힘은 약화되고 맙니다.

복지국가의 두 번째 한계는 남북문제입니다. , 아무리 노동자계급의 삶이 탈상품화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선진국 일국 내 이야기일 뿐, 그 자체가 외부의 발전도상국이나 구 식민지 국가에 대한 막대한 착취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생활개선이 우선시되면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라이프스타일이 확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환경의 수탈이 심각해졌습니다. 공해 문제와 경관 파괴가 발생했고 복지국가는 환경운동계의 비판도 받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문제는 복지국가가 가부장적 성격, 즉 젠더 불평등을 재생산했다는 문제입니다. 노동운동은 결국 다수자로서 남성들의 운동으로 왜소화되어 버렸습니다. 남성이 노동자로서 매일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돌봄노동, 재생산 노동은 여성의 일로 간주되었고, 요리, 세탁, 육아 등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에서 필수적인데도 임금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었습니다. 물론 복지국가에서는 간병, 보육 등 재생산 노동이 탈젠더화되는 측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여성에게 강요된 채로 남아 있었습니다.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고도 경제성장을 선진국에서 더 이상은 달성할 수 없습니다. 또 기후변화로 대표되는 지구의 한계 앞에서 더 이상의 외부화나 수탈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비판을 감안할 때 선진국 중심적이고 관료적이고 남성 중심적 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확산력이 부족합니다. 계급뿐 아니라 젠더, 환경, 인종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어소시에이션과 탈상품화의 길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코먼의 재생이며 만년의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탈성장 코뮤니즘입니다.

혁명의 책인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개량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노동시간 단축과 기능 훈련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임금인상보다 노동시간 단축을 중시했는데, 이 역시 물상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임금 인상을 중시하는 기조 하에서는, 더 오래 일해 화폐를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노동자들은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점점 더 화폐에 의존하게 됩니다.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탈상품화와 결합된 여가는 비자본주의적 활동과 능력 개발의 터전을 마련해 줍니다. 그것이 또 다른 어소시에이션의 발전과 탈상품화의 가능성을 넓혀 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가성비 사고로 회수되지 않는 사회적 부의 풍요가 양성될 수 있습니다.

8. 원고적 공동체 그리고 탈성장 코뮤니즘

마르크스가 공동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마르크 협동체를 비롯한 원고적 공동체에서는 토지가 공유물로 취급되어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연과학과 공동체를 동시에 연구하던 마르크스는 자연의 지속가능성과 인간 사회의 평등의 강력한 연관성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가 편재하면 거기에서 권력과 지배-종속 관계가 생겨나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인간과 자연에서 약탈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원이 고갈되면 이번에는 서로 탈취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회의 번영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다양한 공동체는 전통과 종교, 토지의 공동소유, 추첨에 의한 토지 재분배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 부의 편중을 방지했습니다.

공동체 사회에서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공동체를 나가 버릴지도 모르며, 반대로 자신도 모두에게 미움을 받으면 떠나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권력에 의한 지배관계가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평등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사회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는 반대로 개인은 주종 관계 없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원고적 공동체는 어떻게 지속가능성과 평등을 양립시킬 수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작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연구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공동체 연구 목적이었습니다. 공동체의 경제 시스템은 전통에 의존해 매년 기본적으로 동일한 생산 활동이 반복되었습니다. 정해진 시기에 정해진 작물을 심었습니다. 작물 재배와 수확은 축제나 의식과 연계되어 공동체 천체의 사업으로 관리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는 부가 일부 사람에게 편중되거나 서로 탈취하지 않도록 생산 규모나 개인이 소유 가능한 재산에 강한 규제를 두었습니다. 이를 통해 인구와 자연, 생산과 소비의 총량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정상형(stationary state) 경제를 실현했습니다. 또 먼 곳과의 교역도 한정되어 있어서 자급자족에 가까운 순환형 경제를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약적인 생산력 증대도, 토양을 피폐시키는 일도 없었고 자연에 필요 이상의 부하를 거는 일도 없었습니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의 미르와 독일의 마르크 공동체를 연구하면서 서구가 잃어버린 평등과 지속가능성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공동체 사회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것이 코뮤니즘의 기반이 된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토지의 공동소유가 집단적 영유권의 자연적 기초를 제공하고, 또 그 역사적 환경, 즉 토지의 공동소유가 자본주의적 생산과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협동조합의 대규모 조직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완성된 형태로 제공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카움디움의 멍에 문을 통과하지 않고도 자본주의 제도가 만들어 낸 긍정적인 성과들을 자기 안에 통합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정상적 상태에 놓인 다음에는 근대사회가 지향하는 경제 제도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자살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 초안, 전집19, p. 408)

마르크스는 러시아는 자본주의라는 굴욕적인 길(카움디움의 멍에 문)을 거치지 않고 미르의 공동성을 기초로 하여 단숨에 코뮤니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를 무리하게 도입하여 공동체를 파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외부의 강제력 없이 러시아 공동체는 서구 자본주의의 열매를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코뮤니즘(근대사회가 지향하는 경제 제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도, 미국에서도 노동자 대중과도 과학과도 또 이 제도가 만들어 내는 생산력 자체와도 투쟁 상태에 있으며 한마디로 말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위기는 자본주의 제도의 소멸로 종결될 것이며 또한 근대사회가 가장 원고적인 유형의 좀 더 고차적 형태인 집단적 생산과 영유로 복귀함으로써 종결될 것입니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서유럽 사회도, 전통에 기반한 전근대의 공동체 사회처럼 정상형(stationary)의 지속가능한 사회로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가 존 스튜어트 밀을 참조했습니다. 근대화와 경제성장만을 중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중시하고 부의 풍요를 되찾을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만년의 마르크스가 생각한 자본주의 이후의 고차적 공동체 사회를 사이토는 탈성장 코뮤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사이토는 탈성장 코뮤니즘에서, 강대국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소련이나 중국과는 전혀 다른 포스트자본주의사회의 가능성을 봅니다. 탈성장 코뮤니즘의 핵심은 지금 사회처럼 각자가 지닌 개성을 이렇게 큰 경제적 불평등으로 연결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9. 파리코뮌의 유산

탈성장 코뮤니즘은 자본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을 다시 부정’, ‘부정의 부정을 실현합니다. , 자본의 본원적 축적에 의해 생산수단과 자연을 공동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부정되고 자본이 생산수단과 자연을 사적 소유화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과 자연을 약탈당한 노동자들이 자본의 독점을 다시 부정하고 해체하여 생산수단과 지구를 코먼으로서 되찾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구와 생산수단은 어느 누구도 독점적으로 사적 소유하지 못합니다. 생산자간 협업, 노동 그리고 지구가 생산한 코먼인 생산수단에 대한 사용수익권을 점유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는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은 지구의 점유자, 지구의 용익자에 불과하며 선량한 가장으로서 그들이 사용하는 생산수단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합니다. 물이나 숲, 혹은 지하자원과 같은 근원적인 부는 국가나 시장이 아닌 어소시에이션을 통해 코먼으로서 모두가 함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크스가 상상한 미래 사회는 코먼의 재생입니다. 코뮤니즘은 코먼에 기반한 사회입니다. 사회의 부가 상품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모두가 공유하고 자치적으로 관리하는 평등하고 지속가능한 정상형 경제사회를 만년의 마르크스는 구상했던 것입니다. 코뮤니즘은 증여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활용해 커뮤니티에 기여하고 서로를 돕는 사회입니다. 나눔을 실천하여 생활에 필요한 식량, 토지, 도구, 나아가 지식 등 부의 풍요를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생각에서 파리코뮌의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주의의 결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관료 지배가 획일성을 강요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희생시킨다는 비판이 전혀 해당되지 않는 사회를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일반 남녀가 참여한 코뮌은 다양성이 넘치고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자치 조직이었습니다. 코뮌에는 외국인의 참여가 모두 허용되었습니다. 또 국가의 폭력 장치인 군대와 경찰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리고 관료제를 해체하기 위해 노동자들 자신이 구성원이 된 의회는 입법뿐 아니라 그것의 집행도 행하는 행정기관으로 거듭났습니다. 물론 코뮌에도 몇몇 관료 기능은 남아 있었지만, 그 기능은 시민이 선출하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대리자에 의해 수행되었고 관료 기능을 수행하는 대리자가 받는 임금은 일반 노동자 수준으로 낮췄습니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교회나 학교 등 공공장소의 직무에서 추방되어 생활의 은둔처로 보내졌으며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노동 현장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가혹한 야간근로와 아동노동은 폐지되었습니다. 그 대신 교육도 무상화, 비종교화되어 모든 아이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교회와 국가의 영향력이 제거되었고 노동자들 자신이 가르칠 수 있게 되었으며 남녀의 임금격차도 사라졌습니다. 학교는 일종의 직업학교로 거듭났고 계급, 젠더, 인종의 차이에 관계없이 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또한, 특권없는 어소시에이션과 협동조합이 코뮌에서 속속 생겨났습니다. 이를 통해, 화폐와 상품을 교환해 자본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닌, 증여와 상호부조에 기반한 실천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 영역의 대개혁을 기초로 국가가 아닌, 코뮌이라는 형태의 완전히 새로운 민주적 정치형태가 실현된 것입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혁명으로 국가기관을 탈취하고 그 힘을 사회주의 수립에 사용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생각한 구절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과 손을 잡고 절대 군주제, 봉건적 토지 소유와 반동적 소시민층과 싸운다. 그러나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적대적 대립을 될 수 있는 대로 명확히 의식할 수 있도록 하려고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독일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반드시 도입하게 될 사회·정치적 조건들을 바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무기로 곧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며, 독일의 반동 계급들이 타도된 뒤에 부르주아 자체에 대항하는 투쟁이 곧바로 시작되도록 하기 위해서다”.(공산당 선언)

하지만 파리 코뮌은 노동자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관을 그대로 빼앗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진정으로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을 사용하는 것 이외의 길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파리코뮌의 경험을 거치면서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은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10.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코뮈니즘

파리코뮌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중심에 나타난 포스트자본주의의 모습인, 러시아의 미르 공동체와 유사하게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를 마르크스는 발견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거부하고 자본의 폐지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파리코뮌 이후 마르크스의 사상을 아나키스트 코뮤니즘이라고 사이토 고헤이는 제안합니다. 아니키즘이긴 하지만 개인주의도 무질서한 무정부상태도 아니고, 국가와 자본에 의한 지배 종속 관계를 몰아내고자 아래로부터 연대를 지향하는 어소시에이션주의를 의미합니다.

마르크스가 연구하던 원고적 코뮤니즘과 파리코뮌에서 발견한 새로운 코뮤니즘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경제성장을 절대 목표로 삼지 않고,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공동체 사회가 과거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리고 현대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중첩됩니다.

20세기에는, 소련형 사회주의와 복지국가형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서로 견제했습니다. 그 결과는 사회주의와 복지국가 모두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가 중심이 되어 경제를 관리하는 성장 모델로 수렴했습니다. 성장주의라는 틀로 자본주의의 대안 구상이 왜소화되고 국가권력 지향이 강화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아니키즘과 차별화됩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코먼 사상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만약 협동조합적 생산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대체한다면 그리고 만약 협동조합 연합체가, 공동 계획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생산을 조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상태와 주기적 경기순환을 종식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코뮤니즘, 가능한 코뮤니즘입니다.

협동조합에서는 구성원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출자해 공동경영자가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협동조합에서 노동자들은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에 관한 의사결정을 지향합니다.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임금노동 형태가 종언을 고하고 주체적이고 민주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협동조합에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입니다.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과도한 광고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SNS나 스마트폰 게임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우리의 시간과 데이터를 빼앗아 가는 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보다 노동자의 일하는 보람과 지역의 니즈를 중요시하는 것이 노동자 협동조합입니다. 노동자 협동조합에서 생산에 필요한 지식과 생산수단, 생산물이 코먼이 됩니다.

협동조합은 소셜 비즈니스나 지자체와도 연계해 더 넓은 거시적 범위에서 어소시에이션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코먼을 관리하는 여러 연합체가 서로 생산을 조정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힘으로써, 사회에서 누가 무엇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모른 채 무계획적으로 생산하는 자본주의사회의 존재 방식이 서서히 억제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인 무계획적 분업에 기반한 상품생산의 존재 방식을 사적 노동이라 불렀는데 이러한 사적 노동을 없애고 임금노동을 폐기하는 것이 어소시에이션 사회의 목표입니다. 사적 노동을 노동자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관리하는 생산체제로 전환하려는 것입니다. 현재 상황과 비교해, 불필요한 상품이나 과잉된 품목을 줄이고, 지역에서 생산한 것은 되도록 그 지역에서 소비하는 방식을 적용, 꼭 필요한 수요를 반영한 생산으로 규모를 줄이는 것도 신기술의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탈성장형 코뮤니즘 사회에서는 이렇게 탈상품화로 코먼을 늘리고 노동자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을 통해 사적 노동을 제한해 나갑니다. 그리고 무한한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하는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사회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구상한 미래 사회는 코먼을 기반으로 한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풍요의 내용은 부로 채워집니다. 그리고 부의 풍요는, 워크 세어, 상호부조, 증여에 의해 탈상품화된 코먼의 영역을 늘려 가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윤택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팬데믹 당시 자본주의 하에서 필수품을 스스로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판명된 선진국의 경우, 자급자족형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은 필수적입니다. 이는 전쟁, 인플레이션, 기후 위기로 경제성장이 어려워지고 식량과 에너지 부족, 공급망 교란과 같은 안보 리스크가 커지는 시대의 자기 방위책이기도 합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사라진 사용가치 경제에서는 과도한 광고, 잦은 모델 변경, 계획적인 진부화 등도 불필요합니다. 마케팅, 광고, 컨설턴트 등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일은 더 줄여도 좋을 것입니다. 남은 일을 Work share(일자리 나누기)하면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자유 시간이 증대됩니다. 이때, 일자리 나누기의 이념에 부합하도록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구별도 없어져야 합니다. 후자를 여성에게 떠넘기지 말고 여러 가지 일을 모두 돌아가며 하면서 나누는 것이죠.

노동자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결정할 수 있게 되면,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극복될 것입니다. 그러면 기술은 노동자를 관리지배하는 수단에서 능력의 차이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으로 바뀌게 됩니다. , 기술혁신의 성과는 더 많은 상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능력의 차이를 메우고 작업을 좀 더 평등하게 수행하는 데 쓰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적 분업은 폐지됩니다.

탈성장 코뮤니즘은 교육, 의료, 이동수단 등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음식, , 책 등도 점차 서로 증여하여 주고받게 되는 사회입니다. 또 직업훈련, 데이케어, 육아 지원이 충분히 제공됨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꽃피울 수 있는 사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되는 어소시에이션인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가운데, 코먼의 영역을 넓히려는 움직임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시민이 출자해 전기를 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 시민 전력 시도, 인터넷 앱으로 기술과 물건을 공유하는 공유경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민영화가 진행되더라도 여전히 여러 재화와 서비스가 화폐를 통해 상품으로 교환될 테고 그러한 한에서 시장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도 시장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시장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상품이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리고 단지 자본을 늘리기 위해 인간과 자연을 수탈하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낭비와 독점, 민영화가 사라지면 사회의 협동적 부는 모두에게 풍부하게 샘솟게 됩니다. 각 개인의 필요도 타인의 존엄성과 상호부조라는 관계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을 모두가 관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풍요이며, 모든 사람이 전면적으로 발달한 개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입니다. 상품으로 전락한 사회의 부가 갖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경제성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탈성장형 사회가 실현되고 생산은 비로소 지속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회복 불가능한 균열도 복구됩니다.

by invisibleman 2026. 6. 16. 1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