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혹은 경제는 정치와는 별개의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는 경제나 시장에 개입하지 않을수록 시장은 더 많은 혹은 효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견해가 대학 강의실과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중매체를 통해 일반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부가 세입과 세출의 규모, 수단과 방법을 결정하는 재정정책이나 유통수단인 화폐와 관련된 통화정책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니, 재정정책이나 화폐정책 등 제한된 범위에서, 시장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의 효율성을 달성하는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정부의 경제개입은 용인되고 있다.

하지만,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 등에서 정치의 개입은 아주 중요한 변수로 취급된다. 최근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폐정책이 매우 중요한 화제가 되고 있다. 가까이는 지난 3월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2%에서 1.75%로 인하한 것이 좋은 예다. 또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위원회의 금리결정과 금리 관련 언급은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의 화폐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를 안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양적완화와 테이퍼링 같은 용어가 회자되기도 했다.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일부 EU회원국의 재정위기가 가져온 금융시장의 불안정은 우리의 관심을 유럽중앙은행의 화폐정책에도 쏠리게 했다. 위기극복과정에서 양적 완화를 시행함에 있어, 미국의 연방준비위원회에 비교해, 덜 적극적이고 보다 신중한 유럽중앙은행의 태도는 많은 분석의 대상이 됐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와 유럽 중앙은행의 행동 비교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두 중앙은행이 설정한 정책목표의 차이에 주목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화폐정책이 물가안정뿐만 아니라 성장과 고용도 추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반면 유럽 중앙은행은, 유럽 재정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화폐정책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정관에서는 물가안정을 유일한 정책목표로 두고 있다. 한국은행은 정책목표로 물가안정 외에도 일본 중앙은행과 동일하게 나라경제의 건전한 발전과 영국 중앙은행의 목표이기도 한 금융안정을 명시하고 있다

정치의 경제개입을 최소화하려는 풍토 속에서 화폐정책은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외부의 충격을 받았을 때 회복하는데 필요한 구급 키트처럼 인식되고 있다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앞에서 언급한 화폐정책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할 것인데, 단순히 물가안정, 성장, 고용 같은 거시경제 목표 달성을 위한 응급키트로 환원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장하려고 한다.

우선, 화폐정책은 훨씬 근원적인 차원인 경제구조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부터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보이고 싶다. 화폐를 창조하고 경제주체들에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정치논리가 개입하게 된다. , 화폐의 정의에는 화폐의 공급과 관련된 정치적 선택이 내재해 있고 그 결과 사회 구성원 중 일부는 기업가로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로 규정된다이어서 화폐공급과정에서 발생한 이질적인 경제주체들의 존재로 인해, 거시경제 목표달성을 위해 시행되는 화폐정책은, 앞에서 인용한 사례가 암시하는 것보다는, 의도한 결과를 달성하는 데 있어 훨씬 불확실하다이 글에서는 내세우는 주장들은 케인즈에게서 영감을 받은, 주류경제학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관점과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화폐의 정의를 고려하면, 정치 혹은 국가기구는 화폐의 발생에서부터 경제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시작해 보자.

화폐는 중앙은행에 의해 ''에서 창조된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공급하는 대출은 중앙은행이 ''에서 만들어내는 본원통화라는 재원을 통해 이뤄진다. 중앙은행 장부의 차변에는 시중은행별 대출금액이, 대변에는 본원통화 금액이 기재된다.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으로부터 공급받은 대출을 재원 삼아 예금통화를 만들어 민간에 공급한다. , 중앙은행이 공급한 본원통화를 재원 삼아, 시중은행이 경제주체들에게 대출을 하면, 경제주체들은 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예금의 형태로 해당 은행에 보유한다. 그러면 시중은행은 경제주체들의 예금에서 중앙은행에 대한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금액을 재원 삼아 또 다른 경제주체들에게 대출을 할 수 있다. 이들 경제주체 역시 지급이나 지불 만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대출 받은 금액을 예금형태로 보유하고 시중은행은 다시 이 예금에서 지급준비금을 제외한 금액을 재원 삼아 또 다시 대출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지불준비금으로 인해 대출 재원이 소진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시중은행에 의해 창출되는 화폐를 예금통화라고 한다. 시중은행 장부의 차변에는 경제주체들에게 공급한 대출금 액수가 그리고 대변에는 중앙은행의 대출금과 대출받은 경제주체들이 해당은행에 가지고 있는 예금액이 기재된다.

화폐는 중앙은행과 예금은행으로 이뤄진 금융시스템의 채무로 금융시스템이 경제주체에 대해 대출 형식으로 가지는 채권을 대가로 경제주체에게 공급된다. 이 과정에서 이뤄지는 화폐의 주고받음은 재화나 서비스의 판매와 구매로부터 비롯되는 화폐의 주고받음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금융시스템은 경제주체로부터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한 대가로 화폐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주체의 상환약속을 대가로 화폐를 공급하기 때문이다.

일단 금융시스템으로부터 화폐를 제공받은 경제주체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기획했던 생산 프로젝트를 실현할 수 있다. , 그는, 시중은행이 공급한 화폐를 이용하여, 노동력을 고용하고 생산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를 구매한 다음, 그가 상업적 성공을 꿈꾸는 제품을 생산해 시장에서 그 꿈의 실현 여부를 평가 받을 수 있다.시장에서 경제주체들 중 일부는 금융시스템으로부터 대출받은 금액 이상의 수입을 거두는 반면 다른 일부는 대출 금액을 상환하기에도 부족한 금액을 시장에서 수입으로 거둔다. 이것이 시장의 평가다.

금융시스템의 대출에 기반한 화폐경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시장의 평가가 내려진 이후에, 경제주체는 금융시스템으로부터 대출받은 부채를 일정 이자와 함께 상환해야 한다. 적자를 본 경제주체가 금융시스템이 대출해준 금액을 상환하기 위해서는, 흑자를 거둔 경제주체에게 상환에 부족한 금액을 빌려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폐제도의 지속성을 위해, 흑자 경제주체와 적자 경제주체 간에 금융시장이 형성되고 거래가 발생한다.

경제주체가 시중은행을 상대로 대출을 상환하는 순간에 대출을 통해 해당 경제주체에게 공급된 화폐는 소멸된다.

중앙은행의 본원통화에서 비롯되어 시중은행의 부채로서 창출되는 화폐는 재화와 구별되지 않을 수 없다. 재화는 개별 경제주체들의 주관적인 기획에 따라 생산된다. 재화가 사회적인 의미, 즉 생산자와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타인들의 인정을 받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존재로 거듭 나게 되는 계기는 시장에서 수요를 만나 가격에 해당하는 화폐량을 대가로 교환되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기획에 의해 생산된 결과물이 사회에서 상품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화폐는 사회화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화폐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으로 이뤄지는 금융시스템이라는 공공영역에서 창조된다는 사실에 의해 이미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마치 언어의 경우, 정의에 의해 사적 언어는 불가능하며 오직 공동체의 언어만이 가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언어의 경우처럼, 동일한 화폐 단위의 사용을 근거로 경제공동체를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동일 화폐단위로 정의되는 경제공동체는 국민경제라고 불린다. 화폐는 정의에 의해 중앙은행을 포함하는 공공부문을 내포하고 있고 개인들간에 이뤄지는 인정 과정이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재화에 대해 경제주체들간의 인정이 이뤄지는 시장이 형성되는데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 , 화폐는 시장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금융시스템에 의해 창조되는 화폐를, 해당 화폐를 사용하는 사회에 존재하는 개인들 사이에서 배분하는 것에는 시장의 논리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화폐의 공급 또는 배분이 논리적으로 시장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정치의 논리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의 배분 혹은 공급 과정에 이미 정치가 개입하기 때문에, 화폐정책은 단순히 외부 충격이라는 응급상황을 다루기 위한 구급 키트로 환원될 수 없다. 산업정책을 반영하여 특정 산업에 대한 대출을 장려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장에서 만성적인 실업, 특히 청년실업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부동산 자산가격의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정치권력을 가진 정당의 시각이 화폐정책의 방향을 결정한다.

금융시스템에서 창출된 화폐는 공동체 내 모든 개인들에게 배분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인들은 금융시스템이 창출한 화폐배분에서 완전히 소외 당하기도 한다. 금융시스템이 창출한 화폐에 대한 보편적 접근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앞에서 보았듯이, 화폐의 창조와 공급 그리고 이어지는 순환과 소멸 과정은 화폐공급의 대상이 되는 프로젝트의 상업적 성공에 좌우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중은행은 화폐를 공급함에 있어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담보를 제공할 수 있거나 과거에 이미 프로젝트를 상업적으로 성공시킨 실적이 있는 경제주체가 화폐 공급의 우선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프로젝트가 생산요소의 결합을 통한 재화의 생산 혹은 서비스 제공을 내포하는 경우, 이러한 프로젝트는 일반적으로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 기존에 성공한 프로젝트를 확장하는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화폐를 공급 받는 개인의 수는 오히려 점점 축소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화폐공급을 받은 개인은 기업가라는 경제주체로 전환된다.

화폐를 공급 받지 못하는 개인은 화폐가 유일한 교환의 매객역할을 하는 화폐경제에서 일단은 경제주체가 되지 못한다. , 그의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시중은행에 의해 화폐공급의 대상으로 평가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프로젝트 실현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소비생활을 할 수 없다. 화폐 공급을 받은 경제주체와 고용계약을 맺어 경제주체의 프로젝트 실현에 참가하거나(생산적 노동) 혹은 비생산적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경우에만, 그는 자율적으로 소비와 저축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경제주체가 된다. 화폐 공급을 받지 못한 개인이 경제주체가 될지 여부는 화폐 공급을 받은 경제주체인 기업가의 고용 결정에 좌우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되는 것이 기업가의 고용 결정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기업가와 화폐 공급을 받지 못한 개인 사이에는 종속관계가 성립한다.

정치는 화폐를 창조하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 공동체 성원 간의 주종관계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성원 간의 주종관계에 대해서 책임을 방기해서는 안된다. 정치는 화폐 공급의 대상이 되지 못해 생존을 위해 경제주체에 고용되지 않을 수 없는 개인들의 경제적으로 박탈감을 완화하기 위해 최저임금이나 복지제도를 통해 적극 개입해야 한다.

화폐경제는 적어도 기업가와 노동자라는 두 경제주체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화폐의 창조와 공급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질적인 두 경제주체의 존재가 거시경제 목표를 지향하는 화폐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 경제학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경제학자인 어빙 피셔와 케인즈가 1930년대 대공황를 맞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했던 화폐정책을 비교하고자 한다.

어빙 피셔는 대공황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한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자신의 전재산을 잃어 버렸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그는 부채-디플레이션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일차대전 종전 이후부터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까지 미국의 주식시장은 큰 화황을 누렸다. 그 이유는 일차대전 동안 전쟁 무기로 실현됐던 과학기술의 발전이 종전과 함께 경제적 목적에 동원되면 생산성 향상과 그로 인한 이윤 증가를 초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일반화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반화된 기대를 토대로 많은 개인들이 주식에 투자를 했고 부채를 동원해 투자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황의 전조가 나타나는 과정에서 주식가격이 변동을 거듭하자, 투자자금의 대출해줬던 은행이 채권회수에 나섰다. 채무자인 주식투자자는 주식을 팔아서 은행에 대한 채무를 상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주식가격은 급락했고 채무자인 주식 투자자는 주식을 팔아도 은행에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주식 투자자는 물론 은행마저도 연쇄도산에 빠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은 상품의 가격을 인하하지 않을 수 없지만 가격인하에도 불구하고 판매는 부진하고 재고는 쌓여 생산과 고용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대공황의 시기에 부채를 동원한 투자의 과열이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 피션의 부채-디플레이션 이론이다.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피셔가 제시한 정책들은 화폐의 유통속도를 높이거나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대표적인 것이 stamped money. stamped money는 화폐에 일정 유통기한을 정해 그 기한을 넘기면 액면가의 일정 비율이 상쇄도도록 해, 경제주체들이 화폐를 보유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빠른 시간 내에 지출하도록 하는 장치였다. stamped money는 실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몇몇 소도시에서 사용된 적이 있고 미국의 일부 소도시에서도 사용됐다. 하지만 루즈벨트 정부의 화폐 대체물의 전면 금지 조치에 따라 소멸됐다. 또 다른 정책은, 당시에는 달러의 가치를 일정량의 금으로 정의하는 금본위제가 유지되고 있었기에, 금 대비 달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조치를 취해 보다 많은 화폐의 발행과 유통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디들레이션이 화폐 혹은 금융부문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유통속도가 정상화되고 화폐량이 증가하면서 화폐 혹은 금융부문이 안정화되면 디플레이션도 해결될 것이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 디플레이션 혹은 대공황의 상황에서도 시장기구에 의해 조절되는 실물부문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화폐 유통속도가 정상화되거나,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 경제주체들의 축장으로 감소된 화폐량이 확대되면, 단기간에 균형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내재해 있다.

이러한 피셔의 대공황의 설명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인 화폐정책은 케인즈의 것과는 구별된다. 케인즈에 의하면, 경제주체가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되고 화폐의 창출과 공급이 기업가의 수요에 한정되는 화폐경제에서 비자발적 실업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실업을 근거로 화폐임금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되면, 기업가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도 하락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임금 하락에 따른 상품의 가격하락이 수요 증가를 초래할 수도 있으나 케인즈는 대공황과 같은 시기에서는 임금하락과 그로 인한 상품가격의 하락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또 다른 가격하락과 비관적인 유효수요 전망을 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비관적인 유효수요 전망은 또 다른 고용의 하락과 생산의 감소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임금하락과 가격수준 하락 그리고 고용과 생산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으로 귀결된다.

케인즈의 경제에서는 가격의 자동조절기능이 시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생산 수준과 고용량을 결정하기 위해 예측하는 유효수효의 크기에 의해 고용과 생산 규모 같은 경제의 상황이 결정된다. 대공황 같은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한 화폐정책도 우선 기업가들이 전망하는 유효수요의 증가를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 유효수요의 증가는 케인즈 경제모델의 세 가지 독립변수의 변화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변수는 한계소비성향, 자본의 한계효율 그리고 유동성선호다. 기업가의 투자의사 결정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자본의 한계효율은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을 포함하는 결정요인들이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자율이 증가하면 하락하고 이자율이 하락하면 증가한다. 유동성선호는 경제 내에서 정상이라고 인식되는 이자율 수준과 통화당국이 결정한 이자율 간의 격차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좌우되는데, 정부가 기준금리를 정책적으로 낮게 유지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경제주체들이 정상금리 대비 정책 금리의 수준이 지속될 수 없이 비정상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낮은 금리를 유지하며 증가시킨 통화량은 정부의 의도대로 투자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경제주체들은 증가한 화폐를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보유하려고만 할 것이다.

이처럼, 케인즈 모델에서 화폐는 단순히 유통속도나 물가수준을 통해서만 경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화폐가 창출되고 기업가에게 공급되는, 화폐의 정의 그 자체에 의해서, 화폐는 경제에 관여하는 것이다. 화폐경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경제주체들이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된 경제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폐정책은 화폐가 창출돼 경제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미 경제의 고용이나 생산수준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가 경제에 관여하는 것은 화폐정책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수준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정치의 경제에 대한 개입은 케인즈 경제에 한정된 특징인가? 그렇지 않다. 정치와 경제에 관해서, 오히려 케인즈는 근대경제학 탄생기의 전통을 부활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근대경제학이 정치경제학 혹은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태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경제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케인즈에서 경제이론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행위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질문은 이하에서 살펴볼 스미스의,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경제학 또는 18세기 태동기의 경제학과 정치철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이다.

 

by invisibleman 2015. 4. 21.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