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앞에서 케네의 이론이 실패한 지점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먼저, 경제계급을 정의하는 공통적이고 일관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생산활동 영역에 따라 생산적 계급과 무익한 계급으로 구분한 다음, 토지를 소유하고 그로 인해 순소득을 수취하는 지주계급을 첨가했다. 둘째,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에 근거하여 생산적 계급과 무익한 계급으로 분류하였으나,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은 여타 산업에서 생산된 잉여생산물의 가치를 영으로 만드는 생산가격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가설에 불과했다. 끝으로, 생산가격 시스템을 통해 정의된 순소득을 지주계급은 별다른 정당화 없이 전유한다.
이하에서는 경제적 계급의 정의, 농업의 배타적 생산성 가설, 지주계급에 의한 순소득의 전유 등 이론적으로 케네가 실패한 지점에서 스미스는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스미스에게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케네와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을 구분한다. 하지만 케네처럼 생산활동을 생산적인 부문과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스미스는 노동을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으로 나눴다. 생산적인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교환되는 반면 비생산적 노동은 소득의 지출을 대가로 교환된다. 즉, 생산자가 생산기간 동안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와 생산에 소요되는 도구, 장비, 재료 등을 자본가로부터 선대하는 대가로 자본가가 기획한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생산적 노동이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은 노동 그 자체와 구별되는 대상으로 실현되는데, 이 대상이 시장에서 판매될 상품이다.
하지만 자본이 아닌 지출되는 소득과 교환되는 비생산적 노동은 상품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19세기 부르주와 가정에 고용된 하녀, 정원사나 마부의 노동처럼 노동 그 자체로서 소비된다.
특정한 생산 부분이 아니고 자본이 선대하는 재화와 도구 등과 교환되는 노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농업부분의 배타적인 생산성에 근거한 중농주의자들의 순소득과는 달리, 이윤은 생산적인 노동과 자본 간에 이뤄지는 교환에 근거하는 일반적인 형태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윤은 선대된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는 자본에 귀속되는 소득이 된다.
비생적 노동과 구별되는 생산적 노동을 자본과의 교환관계에서 파악함으로써, 스미스는 자본이 이윤을 전유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윤은 자본가가 생산자에게 선대한 재화와 장비의 가치 대비 순소득의 비율로 측정되는데, 이 비율은 결국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발생한 화폐의 흐름에서 노동이나 토지에 대비해 자본이 스스로에게 배분되는 몫을 획득하는 능력을 가리키고 이것은 다시 자본가-노동자-지주로 구성된 계급사회에서 자본가가 차지하는 지위에 대한 경제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와는 달리 개인 간의 교환관계를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스미스 역시 경제적 계급을 정의한다. 경제적 계급은 상품의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세 종류의 소득에 대응한다. 세 소득은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이고 이를 수취하는 계급은 각각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이다.
자본이 축적이 일어나기 전인, 경제발전의 원시단계에서는 생산자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을 혼자 전유했다. 사냥꾼이 하루 종일 숲 속에서 사냥하여 획득한 두 마리 사슴은 모두 사냥꾼의 몫이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여 자본이 축적되고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변하게 된다. 한편에서는 사냥꾼이 하루 종일 숲 속을 헤매며 사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이나 사냥 장비를 축적한 사람이 자본가로서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식량이나 장비를 소유하지 못한 사냥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고용의사결정에 이어지는 자본가가 선대하는 재화와 장비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자본가는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나 스스로 사냥하는데 필요한 장비를 보유하지 못한 사냥꾼을 고용하고 식량과 장비를 대여하여 자신이 기획한 사냥을 수행하게 한다. 만약, 이 사냥꾼이 사냥에서 두 마리 사슴을 포획했다면, 자본가는 이 사슴 두 마리를 시장에서 처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익에서 사냥꾼이 투입한 노동량에 비례하는 임금을 지불하고, 스스로의 몫으로는 1) 자신이 축적한 장비와 식량의 전체 가치에서 사냥꾼에게 식량과 장비를 대여하느라 감소된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와 2) 대여한 재화가 사냥에 기여한 대가에 해당하는 가치를 배분한다.
자본가가 사냥꾼에게 대여하여 사냥과정에서 소멸되는 재화의 가치에 상응하는 대가가 배분되지 않는다면, 장비와 식량을 축적한 자본가가 이를 사냥꾼에게 빌려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가는 빌려주는 재화와 장비의 가치에 비례하여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배분 받는 대가가 빌려주는 재화의 가치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면 자본가가 이들 재화와 장비를 대규모로 축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대여하는 재화와 장비의 가치에 비례하여 배분되는 대가가 바로 이윤이다.
사유재산제도의 정착으로 사냥이 이뤄지는 숲 역시 누군가의 소유물이므로, 사냥터인 숲을 소유한 지주도 숲의 이용료를 사냥꾼의 포획물 가치에서 배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의 양에 비례하는 임금이나 자본의 양에 비례하는 이윤과는 달리, 지대는 사냥이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숲에 대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소유권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대의 크기는 투입되는 양에 비례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지대 크기의 결정은 경제모델 내에서 이뤄지지 못하고 밖에서 지주와 사냥을 기획한 자본가 간의 역관계에서 결정된다. 지주와 자본가의 역관계는 사냥의 결과물을 판매한 수익의 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지대의 지위와 관련한 모순이 발견된다. 즉, 지대 역시 임금, 이윤과 함께 생산물의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크기가 먼저 결정돼야 한다. 하지만, 지대의 크기 결정이 스미스 경우 경제모델 밖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지대의 크기는 오히려 가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지대는 가격을 결정하는 변수라기 보다는 가격의 영향을 받는 변수다. 지대이론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리카르도(David Ricardo)는 가격이 먼저 결정되고 지대의 크기는 가격에 의해 결정됨을 보여 지대와 관련된 스미스 이론에 내재한 모순을 해소했다.
사냥꾼이 포획한 사슴이라는 상품의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는 위에서 사슴 사냥으로 예시된 생산에 연관된 개인들이 분배 받는 소득이다. 따라서 한 경제 혹은 국가에서 생산되어 거래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합하면 그 결과는 다시 생산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로 환원될 수 있다. 스미스에게 있어 경제적 계급은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경제주체 지위의 동질성과 각자의 지위로 인해 배분 받는 소득의 동질성으로 정의된다. 지대의 결정이 경제모델 외부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스미스에게 있어 경제관계는 임금을 수취하는 노동자와 이윤을 수취하는 자본가 계급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논의된 사항을 수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Pi = Wi + Πi + Ri
상품 i의 가격은 생산 및 유통 과정에 참여한 노동에 대한 대가인 임금 Wi, 자본에 대한 대가인 이윤 Πi 그리고 토지에 대한 대가인 지대 Ri로 구성된다. 단순화를 위해 지대는 생략하고 임금과 이윤에만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임금과 이윤 모두 해당 투입요소인 노동과 자본의 투입량에 비례한다.
Pi = li*w + ki*(r + 1)
li와 ki는 각각 상품 i의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과 자본의 양이고 w와 r은 각각 임금율과 이윤율이다.
상품이 생산돼 시장에서 거래되기 위해서는 해당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참여하는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기대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스미스는 이 정상적인 상황을 자연상태라고 불렀고 이 때 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정의했다. 자연가격은 자연 임금율이나 자연 이윤율에 따라 이뤄지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소득 배분을 지칭하는데 이 때 ‘자연’은 스콜라학파나 중농학파에서처럼 “자연법”같은 선험적으로 규정된 윤리 혹은 정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귀납적 추론에 따르거나 관습적인 의미에 따른 보통 혹은 통계적인 의미에서 평균의 수준을 의미한다. 자연 임금율은 노동자 계급이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임금 수준이고 자연 이윤율은 해당 생산부문에 다음 생산기간에도 동일한 양의 자본이 투자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자연가격은 해당 상품이 시장에서 실제로 거래되는 가격과는 차이가 있다. 스미스는 실제 거래가 이뤄지는 가격을 시장가격이라고 불렀는데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는 달리 수요와 공급의 영향을 반영한다. 시장가격은 자연가격과 다른 것이 정상인데 장기적으로는 경쟁을 통한 자본의 부문간 이동을 통해 자연가격에 수렴한다. 스미스의 시장가격 결정은 ‘깡티용-스미스 규칙’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현된다.
시장가격 = (수요자가 계산한 수요량 * 수요자가 예측한 자연가격)/공급자가 시장에 공급한 양
위의 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장가격은 화폐단위로 표시된다. 스미스에 의하면 화폐는 생산된 상품이거나 혹은 상품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화폐는 자연가격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생산에 참여하는 경제적 계급의 재생산을 보장하는 자연상태의 소득배분을 나타내는 자연가격에 변화가 생긴 경우, 자연가격의 변화분과 화폐의 생산량이나 생산조건의 변동으로 인한 변화분을 구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을 다른 상품으로 측정할 경우, 화폐와 관련하여 언급했던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생산조건이 변하지 않는 가격측정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은 스미스뿐만 아니라 리카르도 같은 고전파 경제학의 큰 과제가 됐다. 스미스가 발견한 기준은 바로 노동이다. 스미스가 노동을 가격측정의 기준으로 채택한 것은 노동이 유일한 생산요소라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일정량의 노동은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서 노동자에게는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에서 근거해 노동,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배 노동을 기준으로 선정했다. 즉, 통상적인 건강상태에서 숙련도나 능력에 따라 노동자가 노동을 한다는 것은 그 노동시간에 해당하는 휴식, 자유, 육체적 평안함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한 휴식 등이 노동에 대한 보수로 임금을 얼마나 받는 것에 상관없이, 노동자가 치르는 노동의 가치다. 스미스에 의하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노동의 보수는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이것은 노동과 교환되는 곡물과 같은 상품의 가치가 변하는 것이지 지배노동의 가치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지배노동은 항상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상품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가 된다.
지배노동을 통해 측정된 상품의 가치는 해당 상품의 실질가격이 된다. 자연가격내지 실질가격을 측정해 보자. 먼저 지배노동을 단위로 측정된 자연 임금률을 계산해보자. 임금률은 하루처럼 일정 단위기간 동안 진행된 노동에 대해 지불하는 실질가격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실질가격을 지불하면 단위노동을 살 수 있거나, 혹은, 이를 스미스가 사용한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면, 지배할 수 있다. 따라서 임금률을 지배노동 단위로 표현하면 항상 1이다. 이렇게 결정된 임금률을 자연 임금률로 쉽게 변경할 수 있다. 즉 노동자 혹은 그의 가족이 재생산하기에 충분한 양의 재화를 1단위의 지배노동이 구입 혹은 지배할 수 있도록 정하면 된다. 가격측정의 척도가 되는 1단위의 지배노동과 교환되는 재화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경제 밖에서 이뤄진다.
가격 Pi 즉, 생산물 i가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은 Wi, 즉, 노동에게 배분되는 소득과 Πi, 즉 자본에게 배분되는 소득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Wi는 li * w, 즉, 생산물 i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의 양에 임금률을 곱해 구할 수 있는데, 임금률, w의 값이 1이므로 지배노동으로 측정된, 노동에 배분되는 소득은 해당 상품의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의 양과 같아진다.
생산물 i의, 지배노동으로 측정되는 가격을 구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것은 자본에게 배분되는 소득부분 Πi 나 ki*(r + 1) 혹은 이윤율 r을 결정하는 것이다. 위의 식으로 표현하면,
Πi = pi - li.
이제 자본가가 투입하는 자본의 양이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의 양과 동일하다고 가정해 보자.
즉, ki = Wi = li * w = li. 이를 위의 식에 대입하여 이윤율 r을 구하면,
r = (pi - li)/li - 1
이 식에 따르면 이윤율의 크기는 생산에 투하되는 노동량뿐만 아니라 해당 상품이 지배하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즉 이윤율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윤은 가격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임금의 크기와 함께 이윤의 크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윤의 크기와 가격을 결정하는 과정에는 순환논리가 존재한다. 이 순환논리로 인해, 스미스 이론의 틀에서는 이윤은 물론 가격도 결정할 수 없다.
이러한 아담 스미스의 가격 및 분배이론 실패의 원인은 지배노동 가치설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살펴 본 것처럼 지배노동 가치설은 재화의 교환가치를 특정 교환, 즉, 노동과의 교환 비율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이윤의 크기를 설명할 수 없다.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 근거한 이윤 개념 등을 감안할 때, 아담 스미스는 노동자-자본가-지주 계급으로 구성된 계급사회에 적합한 이론체계를 수립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지배노동 가치설에 기초를 둔 자연가격 이론을 통해 가격과 이윤의 크기를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스미스의 체계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1) 지배노동가치설을 포기하여 교환과정에서 벗어나, 생산과정에서 직접 가격을 구하여 이를 통해 이윤을 구하거나
2) 생산과정에서 직접 이윤율을 구하여 이를 이용하여 가격을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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