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데이비드 웬그로(David Wengrow)는 『모든 것의 새벽』 4장 「자유로운 인간, 문화의 기원, 사유재산의 등장」에서, 동물의 물질대사는 필요한 것만 생산하는 것에 비해, ‘과잉의 생물’로서 인간의 물질대사 즉 노동은 예외 없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데, 이러한 잉여 창출 잠재력이 특정 사회구조와 결합될 때 인간을 모든 생물 종 가운데에서 가장 자연 파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기술합니다.
이러한 그레이버와 웬그로의 기술은 『모든 것의 새벽』이,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제시된 이후 아담 스미스뿐 아니라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미친, 농업 혁명을 인간 사회 내 수직적인 위계 질서 도입의 계기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는 책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농경을 통해 토지, 가축 등 생산 수단이 발전하고 잉여 곡물이 축적되면서 이를 전유하기 위해 전업 전사, 사제, 관료 같은 엘리트 계급이 등장해 지배와 피지배 계급으로 분화된 사회 그리고 국가가 발생했다는 관점에 저자들은 반대합니다. 『모든 것의 새벽』의 두 저자는 불평등의 기원을 농업 혁명에서 찾는 대신, 잉여라는 개념에 집중하여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존의 필요를 넘어서는 잉여를 만드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 ‘과잉의 생물’이라는 인간의 정의에는 잉여를 생산함으로써 인류는 예술, 문화, 거대 기념물 등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고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을 창조할 수 있었다는 점뿐 아니라 잉여의 가장 큰 몫을 전유하기 위해 지배계급이 사회적·¸대사적 구조를 잉여생산 위주로 조작해온 인간 사회의 역사적 특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반복하지면, 인간을 ‘과잉의 생물’로 기술한 저자들의 주장은, 잉여는 인류가 수렵‧채집생활에서 농업 생산으로 자연스럽게 진화한 결과물이 아니라, 잉여를 전유하기 위해 잉여생산에 맞춰 생산관계을 조절해온 인류 역사를 반영합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량을 보존하거나 축적하지 않고 당일이나 익일에 소비하는 ‘즉각적 보상(immediate return)’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물질적 잉여를 남기지 않고 평등한 수렵‧채집 사회를 유지하는 아프리카의 하드자(Hadza) 족을 연구한 인류학자 우드번(James Woodburn)을 인용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생태 환경과 맺는 관계는 역사적 또는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 스스로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와 경제체제의 유형에 의해 조건지어 집니다.
도구 사용 능력, 사회적 분업 구조를 갖춘 사회를 구성하는 능력 등을 감안할 때, 인간이 잉여를 생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레이버와 웬그로를 따라 인간을 과잉의 생물로 규정하는 것은, 소수의 지배계급이 그 잉여를 독점하기 위해 사회와 생태 환경의 물질적 대사 관계, 사회 구성원 간의 생산관계를 조직하면서, 인간은 연장자나 지도자의 명령을 거부할 자유, 집단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단을 떠날 자유, 개별 경제주체의 자율성 그리고 생태 환경과 맺는 상호 부조적 관계를 모두 상실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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