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설가 일본인 아오야마 치즈코는 그녀의 통역사이자 비서 역할을 하는 타이완인 왕첸허에게 이렇게 말한다.
“러우싸오와 사시미는 모두 미식이에요. 장삼과 와후쿠도 다 아름답고요. 저한테는요. 세상 만물에 있어서 본질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러우싸오와 장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틀림없이 세상에 존재할 거예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이도 존재하는 걸요.”(203페이지)
아오야마 치즈코는 일본 국적이지만 타이완에서 태어나 타이중 시역소에서 근무하는, 미시마에게, 펑위안에서 센단가오를 먹으며, 그리고 지룽에서 먹었던 치쿠와를 연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국이 남쪽 섬에서 확실히 아름다운 것들을 탄생시켰어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원석을 다듬어서 보석이 빛을 발하도록 만들었죠.”(382페이지)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 이런 발언도 추가한다.
“저는 삶을 좀 더 편하고 윤택하게 만드는 건설 사업이나 시설들을 사람들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392페이지)
아오야마 치즈코는 큐슈 명문가 출신으로서 20대 중반에 이미, 소설과 그 소설의 영화화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리고 영화화된 작품의 유명세 덕분에, 1938년 4월부터 1939년 4월까지 1년 동안 대만으로 와서 일련의 강연과 타이완 여행기를 언론 매체에 기고하며 타이완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아오야마 치즈코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자연과학적으로든, 사회과학적으로든 인문과학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제국에 의해서든, 어떻게든 표상되어져야 하는 단일한 세계말이다. 서구에서 유래했으나, 아오야마 치즈코에 의해 발화된 근대의 세계관이자 제국주의의 세계관을 왕첸허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아오야마 치즈코가 타이완을 방문한 시기가 1938년이라는 점이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938 타이완 여행기는 일본과 타이완을 잇는 항로의 기점인 지롱항에서 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을 거쳐 가오슝에 이르는 타이완 종단철도를 이용해 타이중을 기점으로 타이완의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여행한 기록이다. 종단철도는 식민지 타이완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일본 제국주의가 건설했다.
타이중 시역소의 미시마는 아오야마 치즈코에게 이런 말을 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본섬의 맛이라는 건 사실 진짜 맛있는 맛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것보다는 희귀하고 기이한 짐승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지요.”(390~391페이지)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나 아시아 대륙 혹은 오세아니아 지역을 여행하는 근대 서구의 여행자를 연상시킨다. 여행지의 모든 것들을 타자성의 영역에 위치시키며 자신이 겪는, 군국주의가 초래하는 불편한 현실을 비춰보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오야마 치즈코는 왕첸허에게 이렇게 묻는다.
“첸허 씨는 어느 종족에 속하나요?”(57페이지)
왕씨는 푸라오인이다. 푸라오인은 대만과 가까운 복건성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이주한 한인들이다. 이들은 오래된 이주 역사 과정에서 타이완 섬에서 평야 지역과 주요 항구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했다. 푸라오인 외에도, 대만에는 하카인이라는 한족도 이주해 정책했다. 전란을 피해 화북 지방에서 광둥성이나 푸젠성 등에 정착했던 한족의 일부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전환하는 시기에, 명조를 내세운 타이완의 일부 정치세력을 청나라가 진압한 후 타이완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하카인이다. 하카인들은 신주나 타오위안 등 타이완 섬의 북동쪽에 집중적으로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리고 아오야마 치즈코는 왕첸허에게 와후쿠를 입힌다.
아오야마 치즈코의 끈질기고 열정적인 플러팅에도 왕첸허는 통역사와 비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러다가 아오야마 치즈코가 타이완을 떠나기 3개월 전인 1939년 1월에 업무관계를 끝낸다.
왕첸허는 식민지인으로서 제국의 세계관을 용인하지 못하고 아오야마 치즈코의 통역사와 비서 역을 그만둔다. 하지만, 왕첸허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반일운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1938 타이완 여행기에서 중일전쟁은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은 다음에 인용된 타이중 시역소의 미시마가 아오야마 치즈코에게 말하는 대목에서 추정할 수 있다.
“(아오야마 선생이 그 유구함을 높이 평가한) 펑위안의 마조묘보다 타이중 마조묘의 역사가 더 길지요. 다이쇼 초기에 타이중 신시가지가 개선되면서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랜 신당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대신 질서 정연하고 교통이 편리한 타이중 거리를 얻게 되었지요. 이제 타이중 마조묘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타이완에 근대화를 도입하는 과정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푸라오인이나 하쿠인들이 특히 17-19세기에 마조묘를 타이완 평야지역 곳곳에 세울 때, 타이완 원주민들은 고산지역으로 이주했다. 일본 제국주의 이전에, 타이완 섬의 한족들은 타이완 원주민들에게 제국주의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었다.
왕첸허가 반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던 것은 타이완의 이런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중국 그리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현재 타이완의 모습이 역으로 투사된 결과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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