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폐가 통용된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금이나 은처럼 물리적으로 실체를 가지는 대상이 화폐의 역할을 수행해왔기 때문에, 화폐는 상품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메인스트림 경제이론에 의하면, 화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화폐에 대한 수요가 존재해 화폐의 가치가 (+) 값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역으로 화폐의 가치가 0으로 하락해 화폐 수요가 (+) 값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화폐를 교환의 매개로 사용하고, 화폐 단위로 가격을 표시하던 화폐경제가 일시에 물물교환경제로 대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전개는 교환 매개로서 화폐가 상품거래의 방법을 규정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화폐가 교환의 매개가 되는 사회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체계로 인해, 아담 스미스가 기술한 바와 같이, 모든 개인들이 교환을 통해서 생존하는, 다시 말해, 모두가 상인이 되는 사회다.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의 존재를 대변하는 제도적 장치다.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화폐는 결제체계로서 존재한다. 결제체계로서 화폐는, ① 상품의 거래를 거치지 않고 화폐가 처음으로 경제주체에게 공여되는 방식으로 생성되는 계기인 “monnayge”, ② 화폐가격 결정 방식이기도 한, 화폐를 이용한 상품의 거래 메카니즘, ③ “monnayge” 조건의 상이함과 상품 거래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상품거래 이후 (+) 화폐잔고를 가진 경제주체와 (-) 화폐잔고를 가진 경제주체의 금융거래, 그리고 ④ 상품 거래와 금융거래를 마치고 생성됐던 화폐가 소멸되는 계기 등을 포함한다. 이하에서는 상기한 네 가지 계기들을 하나씩 차례로 기술하골 것이다.
결제체계로서 화폐를 이해할 때 결제체계를 구성하는 계기들 중에서 경제시스템의 진화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monnayge다. 화폐를 교환의 매개로 이용하는 경제에서 상품의 거래는 화폐를 주고받음으로써 실현된다. 매수자는 상품 구입 전에 필요한 액수의 화폐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화폐를 이용한 상품거래가 조직화되려면, 상품거래 이전에, 일정 규모의 화폐가 일정 수의 경제주체들에게 공여되어야 한다. Monnayge는 상품거래 이전에 교환의 매개가 경제주체에게 공여되는 과정을 개념화한 것이다.
상품거래 전에 일정 규모의 화폐를 일부 경제주체에게 공여하는 monnayge가 화폐경제에서 중요한 이유는, monnayge를 통해 화폐를 공여받은 경제주체가 자기가 원하는 상품의 거래를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Monnayge를 세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화폐와 화폐 발행의 근거가 되는 '부'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는 화폐 공여의 근거가 되는, 화폐거래 이전에 일정 규모의 화폐적 가치로 인정받은 존재다.
근대 금본위 화폐제도를 이용해 monnayge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자. 금본위제도는 화폐 단위를 일정 순도를 가진 금의 일정 무게로 정의함으로써,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고정시키는 제도다. 금본위제 하에서 monnayge는 금화를 발행하는 기관인 조폐청으로 경제주체가 보유한 금을 가지고 와서 금의 무게에 해당하는 화폐를 요구할 때 이뤄진다. 여기서 경제주체가 가지고 온 금과 이로부터 주조된 금화는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개인주체는 언제든 보유한 금화를 녹여 금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금이 교환의 매개인 금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 금본위 제도에서는 국내 혹은 국외에서 금광을 개발했거나, 다른나라로 유입되는 금을 해적질을 통해 갈취하는 것과 같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 성공의 경험을 통해 금을 축적한 개인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다. 과거에 성공을 축적한 개인이 현재 경제생활에서도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다.
반면, 현대의 신용본위 화폐제도는 금본위 화폐제도의 보수적 성격과는 대비를 이룬다. 신용본위 화폐제도는 과거에 이룬 경제적 성공을 통해 축적된 부가 아니라 미래에 실현될 상업적 프로젝트의 성공을 부로 인정하고 평가해서 화폐의 발행이 이뤄진다. 즉, 신용본위제도에서 화폐의 발생은 금융기관이 상업 프로젝트의 수익성에 대한 기대를 근거로 공여하는 대출을 통해 이뤄진다. 상업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인정받아, 신용을 공여받은 경제주체는 대출을 통해 획득한 화폐를 이용해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투입 요소를 구매해, 재화를 생산하고 판매함으로써 사업소득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이 신용을 공여받은 경제주체가 향유하는 경제적 주도권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제발전 이론”에서 슘페터는 신용을 공여받은 경제주체를 ‘기업가’ 그리고 공여의 대상된 신용을 ‘자본’이라고 불렀다.
반면, 현대 신용본위 화폐제도에서 monnayge의 대상이 되지 못한 개인들은,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하도급계약이나 고용계약 등을 통해 monnayge 대상이 된 경제주체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해, 사업소득이나 근로소득을 획득하는 경우에만, 계획한 소비 혹은 저축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제주체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계기는 화폐를 이용한 판매와 구매가 이뤄지는 시장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시장은 하나의 상품이 거래되는 trading post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각 trading post에서는 거래되는 상품의 화폐가격이 결정된다. 화폐가격은 해당 상품을 구입하기 위해 지출되는 화폐량과 판매를 위해 시장에 공급된 상품량의 비율로서 결정된다.
화폐를 이용하는 교환 메커니즘을 통해서, monnayge의 화폐 공여를 받은 경제주체는 다른 경제주체와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자신의 상업적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예상하는 판매수익을 실현하기 위해 가격을 예측하고 생산량을 계산해 이에 필요한 생산요소를 구매하려고 monnayge를 통해 공여받은 화폐량을 지출한다. 하지만, 지출한 화폐량이 자신이 의도한 수량의 생산요소를 구입하는데 충분한지 부족한지, 그리고 그에 따라, 구입한 생산요소를 이용해 생산한 상품의 양도 처음 의도한 규모를 초월할지 아니면 그에 미치지 못할지는 동일한 생산요소를 구입하기 위해 화폐를 지출하는 다른 모든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생산한 제품의 시장가격도 다른 경제주체들이 이 상품에 지출하기로 한 화폐의 양에 의해 좌우된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monnayge를 통해 화폐를 공여받은 경제주체는 자신이 의도한 거래를 개시할 수 있지만, 시장 가격과 거래량은 다른 모든 경제주체들이 의도한 거래량과 지출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프로젝트 기획 단계에서 개별 주체들이 예상한 생산요소와 재화의 가격은 시장 메카니즘에 의해 결정된 시장 가격과는 다른 것이 일반적이라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개인의 에상가격과 시장가격의 격차로 인해, 개인별 프로젝트 실현의 결과는, monnayge의 근거가 됐는 개인의 수익 전망과 거래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평가 사이의 괴리. 즉 monnayge로 공여 받은 금액, 달리 표현하면, 대출금 상환에 필요한 금액을 초과하거나 부족한 수익으로 나타난다. 개별경제 주체들은 monnayge로 공여받은 금액을 상환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프로젝트 실현에도 불구하고, 공여받은 금액을 상환할 수 없게 된 경제주체는 상환에 필요한 금액을 초과한 수익을 거둔 경제주체들과 금융거래를 통해 상환에 필요한 금액을 확보해야 한다. 공여받은 금액을 상환함으로써, 발행된 화폐는 소멸된다. 금융고래로 인해 발생한 부채는, 다음 경제활동 시기에, 화폐를 공여받아, 지난 번 프로젝트의 실패를 반영하는 다른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현해, 수익을 거둘 경우에 상환할 수 있다.
신용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결제체계에서도 상당 규모의 화폐발행은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담보 대출이다. 부동산 담보 대출은 과거 경제활동의 성과로서 개인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가치를 담보로 하여 화폐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담보대출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되는 주택구입자금 대출은, 신용본위제도에서 monnayge인 신용을 공여하는 대출로 분류되지 못한다. 대출의 대상이 되는 프로젝트, 즉 대출받은 자금을 이용해 구입하는 주택이 자체적으로 소득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택구입자금 대출의 상환은 해당 경제주체가 별도의 소득에서 확보한 재원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의미에서, 주택구입자금 대출은 미래 소득을 앞당겨 소비한 것이다. 이미 임금 등 가계의 소득원의 수준과 비교할 때, 주택가격이 훨씬 높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택을 구입을 위해 발생된 대출은 임금의 일부를 저축하는 방식으로 상환될 수 없다. 한 세대의 주택 구입에 소요된 대출 자금은 다음 세대가 해당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금융기관으로부터 새롭게 대출을 받아야만 상환될 수 있다. 현재 화폐 발행의 상당부분이 이러한 주택구입 자금 대출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금융부문을 구성하고 있는 통화당국과 금융기관은 젊은 세대들이 부채를 일으키도록 해서 화폐를 발행해 기성세대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주거용 부동산의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소유하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는 임금 등 통상적인 가계소득원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부채를 일으켜야만 한다. 그 부채는 그 이후에 오는 미래세대가 다시 부채를 일으켜 해당 주거용 부동산을 더 높은 가격에 구매함으로써 상환될 수 있다. 우리 경제에서 발행되는 상당 부분의 화폐는 고용과 소득을 유발하는 목적으로 발행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세대의 자산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발행된다. 이러한 메카니즘 자체가 지배하는 사회는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음 세대를 유혹할 수 있는, 입지의 부동산을 고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미래의 꿈을 꿀 수 있을까.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