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후보의 첫번째 공약이 인공지능, 바이오/헬스케어, 콘텐츠/문화, 방위/우주항공, 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상기한 공약은 그 기본 논리가 개발독재가 내건 공약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 유신 독재자는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임금을 강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수출 100억불 달성하면 모두가 잘 살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그 때 수출공단 노동자가 받던 저임금은, 독재자의 약속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로, 혹은 프레카리아트에게로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이전됐다. 민주당이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는 정당이라면 이제는 경제성장에 어떤 사회/경제적 희생이 따르며 그 희생을 부담하는 계층을 어떻게 포용해야 우리 사회/경제의 지속가능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선거공약을 작성할 때가 되지 않았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인공지능, 에너지 등 산업에서 글로벌 대기업의 육성은 개발독재시대에서처럼 관료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지난 계엄 국면에서 이 나라 관료 중에서 가장 고참인 한 모와 최 모가 보여준 행동은 관료들이 헌법질서 수호보다는 자기들 눈앞의 효율성 챙기기에 훨씬 더 적극적임을 보여줬다. 계엄의 희생자가 될 뻔 했던 민주당이 다시 관료제를 믿고 관료제의 적극적 개입을 필요로 하는 정책을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웠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계엄령에 맞서 헌정 질서를 지키는 투쟁의 과정에서 관료들의 무능과 기회주의를 목격한 시민들에게 관료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를 보여주는 이러한 공약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 공약은 지난 세 번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스스로, 적어도 경제 혹은 산업 정책의 분야에서는, 독재시대를 청산하는 데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지도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오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는 계엄령 선포로 전임 대통령이 탄핵으로 해임된 상황에서 치뤄짐에 따라, 기존 여당이 계엄령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해, 민주당의 일방적 우세가 예상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민주당은 계엄령에 맞서 싸운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산업분야인 인공지능, 바이오 등을 육성한다고 해도, 우리사회의 일부 계층을 소외시켜온 구조를 그대로 두고, 또 비민주적 성향의 관료조직을 중심으로 진행한다면, 이는 시민에 대한 배반이다.
계엄령과의 싸움에서 민주당은 새로운 집권 기회를 가지게 된 것 외에, 무엇을 배웠을까? 인구 감소 추세, 이상 기후 현상 등에서 보이는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 위기를 왜 경제성장으로 대처하려고 하는가? 경제성장은 독재자가 그의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계엄령에 맞서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수호한 민주당이 고성장을 내세울 이유는 없다. 자연적 환경 그리고 사회적 환경의 악화는 경제성장의 결과물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공존할 수 있는 경제는 어떤 동학으로 움직일까를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by invisibleman 2025. 5. 24. 21:47
환경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경제학은 패러다임의 도약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의문을 다루는 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효용 극대화라는 보편적 법칙에 충실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이용을 배제할 수 없어, 이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경합해야 하는 공유지로서 자연 환경을 기술하는 주류 경제학의 접근법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주류 경제학은 공유지에 사적 소유권을 도입함으로써 공유지의 비극을 종식하고 환경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기후위기와 생물종다양성 위기의 증상은 우리 주위를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작업의 발단은 지난 2월 초 경제학 공동학술 대회에서 Michel Aglietta & Etienne Espagne(2024), ⌜Pour une Ecologie Politique : Au-delà du Capitalocène⌟ 에 대한 일종의 리뷰 작업을 발표한 것이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Michelle Aglietta 선생은 그 책에서 경제학이 자연 환경의 지속가능성 문제를 다루는 패러다임인 공유지의 비극을 신화로 취급하고 인류세(anthropocene)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생태부채'라는 대안적 신화를 도입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공유지의 비극을 신화라고 한 이유는 주류 경제학이 공유지의 비극을 과학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소유권-시장 등의 개념으로 구성된 패러다임을 부과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야기처럼 사용한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공유지의 비극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신화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를 덮친 문제의식은 선생이 내세운 생태부채 개념의 근거로 인용한 Philippe Descola의 작업이 너무 간략할 뿐만 아니라, 데스콜라가 주장한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에서 유래했다.
​Michel Aglietta 선생을 비롯해, 내 지도교수였던 Jean Cartlier, André Orléan 등 소위 화폐에 대한 프랑스 제도주의적 접근으로 분류되는 경제학자들은, 인류학에서 존재론적 전환이 일어다던 시기에, Marcel Mauss와 그 이후의 인류학 작업을 인용하며, 화폐를 총체적 부채의 개념을 통해 제시했었다. 화폐에 대한 프랑스 제도주의적 접근은 총체성으로서 상품에 대립하는, 화폐는 단일하고 유일한 교환의 매개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맑스의 화폐에 대한 인식을 인류학적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데스콜라와 팀 잉골드를 중심으로 인류학 책과 논문을 읽고 있다. 이는 그들의 연구주제가 존재론적 전환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전환은 인류학에서 1980년대부터 20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급격하게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이후의 연구 패러다임인데, 근대 르네상스 이후 서구에서 발달한 근대 과학의 기초를 형성하는 '주체-객체', '자연-인간', '개인-사회'의 이분법에 근거한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대안으로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물리적 연속성/비연속성, 내면적 연속성/비연속성의 기준에 따라 데스콜라가 분류한 4가지 존재론적 양식 중에서 상기한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 역할과 함께, 제국주의를 통해 서구 중심주의를 강요했던 naturalism을 제외한 animism, analogism, totemism 등의 존재론적 양식을 복권하는 것이다. 과학 작업은 존재론적 양식에서 독립적이거나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 작업은 더디고 그에 따라 직관적으로 보았던 길도 흐릿해지고 있다.
by invisibleman 2025. 5. 15. 11:18

헤테로토피아 (1966.12.7 라디오 프로그램 '프랑스 문화'의 '유토피아와 문학' 특강 시리즈 강연록)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공간에 대항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유토피아의 성격을 가질 뿐만 아니라 사회 내에서 고안되고 제도화된 공간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에 의하며,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푸코는 생략했지만, 유토피아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기독교가 지배하면서 신의 구원을 갈구하던 서유럽에서, 인간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 없었다. 인간이 사는 행성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 함께, 인간 또한 신을 닮은 창조물로서 부여받은,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비인간적 존재에 비해 우월한 지위 그리고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적 지위를 포기하게 됐을 때, 인간은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게 됐다.
앞서 언급한 신이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의 외면적인 관계는, 의식주 전통의 지속 하에서 비인간적 존재를 계속해서 이용하면서 그리고 현미경과 망원경의 발명과 자연과학의 발전의 도움으로 인간 또한 비인간적 존재와 물리적으로 동일한 물질과 원리에 따라 구성돼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오히려 강화됐다. 반면, 인간은 비인간적 존재와의 내면적 유대를 상실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도 삶에서 중요성을 잃지 않은 인간의 영혼은 개별적인 개인의 내면에서, 비인간적 존재와 이어지지 못하고 고립된 체로 존재했다.
이러한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비인간적 존재를 미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학적 재구성은 우선 서구 미술사에서 풍경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풍경은 이미 15세기 르네상스 초기 작품, 예를 들면,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에서 소재가 되는 성모와 아기 예수, 동방박사의 경배 등과 같은 그림의 소재를 품은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배경의 자리에 처음 풍경이 놓이게 됐을 때, 풍경은 그림의 중심 소재로서 표현된 사건과 긴밀한 연관성 없이 그려졌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이러한 배경을 하도급계약의 형식으로 다른 화가에게 그리게 하는 관행이 있었고, 주로 프랑스 부르고뉴 혹은 프랑드르 지방 출신의 작가들이 주로 그렸다고 한다. 풍경은 점점 중요성을 가지게 됐고, 그림의 소재와도 점점 더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17세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셍(Nicolas Poussin) 그리고 로랑 드 라 이르(Laurent de la Hyre)가 있다. 실제로, 푸셍과 로랑 드 라 이르의 그림 속 풍경은 영국식 정원을 대표하는 Stowe Gardens으로 구체화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스토우 가든스는 헤테로토비아의 사례로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by invisibleman 2024. 1. 26. 2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