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의 기원
정치경제학강의 2: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man
2015. 5. 6. 23:08
케인즈는 거시경제의 성과를 고용을 단위로 측정한다.
그러나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은 케인즈의 경제주체들 중 어느 누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개입하는 변수가 아니다. 기업가는 기업활동에 관련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고용할 양에만 관심을 가질 뿐 경제 전체의 고용 수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물론,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에 대한 기대가 유효수요의 크기를 예측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효수요를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로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이기 때문에, 기업가의 행동을 전체 고용 수준의 함수로 환원할 수는 없다. 노동자 또한 전체 고용 수준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용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따라서, 고용수준은 경제주체들 간의 경제적 관계의 총합으로 정의되는 경제 시스템 혹은 시장을 구성하는 변수로 포함될 수 없다. 전체 고용 수준에 관심을 가지는 주체는 경제 시스템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시장 밖에서 고용의 양을 측정하고 질적 평가를 내리는 국민계정 담당자나 행정관료 혹은 정치가가 그러한 주체일 것이다.
정치가들이 고용수준에 관심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결정을 하는 화폐정책이 화폐의 창출과 배분을 통해, 사회적 분업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 그로 인해 고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들은 경제 시스템 내부에 존재하는 주체라기보다는 경제시스템을 형성하는 주체로서 인식돼야 할 것이다. 즉, 화폐경제에서 경제주체들은 화폐의 창출과정에 참여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기업가와 노동자로 구분된다. 화폐의 창출과정에 참여해 화폐를 배분받는 주체는 기업가로 정의되고 이들은 분배받은 화폐를 가지고 상품이나 노동을 구입해, 자신이 계획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들은 경제주체로서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반면, 화폐의 창출과정에서 화폐를 배분받지 못한 주체들은 배분받은 화폐가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소비나 생산 활동을 영위할 수 없다. 화폐창출과정에서 화폐를 배분받지 못한 개인들 중 일부를 기업가들이 고용해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경우에만, 그들은 소비나 저축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제주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화폐의 창출과 배분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고용은 화폐경제에 존재하는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에 개인을 편입하는 사회화의 장치다. 따라서 화폐배분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고용되지 못한 개인은 경제주체로서 경제체제에 편입될 기회를 얻지 못해 사회화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실업은 개인에게도 불행이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도 병리현상이다. 이러한 윤리적 판단으로부터,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통해 소외 없이 모든 개인을 사회화하는 것을 지향해야 하는 정치가의 입장에서는 실업과 소외의 발생과 존재에 대해 자신이 책임 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제 전체의 고용수준에 정치가는 윤리적 혹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용을 단위로 삼은 케인즈의 경제학은 경제주체의 사적 이익 추구를 통해 최적의 사회 질서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혹은 정치적 가치가 극대화할 수 있도록,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정치가 조절해야 한다는 아담 스미스가 정의한 '입법자의 과학'으로서 정치경제학 전통에 잘 부합한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역시 '입법자의 과학'의 전통에 잘 부합한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사회적으로 최선인 결과를 초래하도록 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이 추구하는 사적 이익과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통해 얻어진 최선의 사회적 결과 사이에는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근대사회의 개인은 사회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전근대적 개인과는 다르다. 근대적 개인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존재다. 보다 정확하게는 개인은 논리적으로 사회가 정의되기 전에 먼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별, 신분, 지역 등에 의해 정해진 사회구조 속 위치에 의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능 중 하나를 수행하도록 정해진 전근대적 개인과는 달리, 근대적 개인은 독립적으로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 때, 사적 이익은 논리적으로 사회에 앞서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측정단위에 선행하기 때문에 사회적 표현을 가질 수 없다. 사적 이익은 단지 개인의 열정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열정에서 유래하는 사적 이익 추구들이 모두 공존할 수 있을 때, 사적 이익은 객관적인 사회적 표현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낸 사회적으로 최선인 결과는 사적 이익과는 다른 관점에서 인식될 수 밖에 없고 측정의 기준 또한 동일할 수 없다.
열정을 추구하는 개인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사적 이익이 사회적 표현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한 개인이 추구한 사적 이익이 다른 개인들의 사적 이익과 공존할 수 있는 경우에만 개인들은 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시장에서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는 교환을 통해 이뤄진다. 교환행위는, 스미스에 의하면, 인간이 타고난 자연적인 성향에서 유래한다.
교환 이전에, 개인의 열정은 노동을 통한 생산활동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물은 교환의 대상이 된다. 교환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교환에 참여하는 한 경제주체가 다른 경제주체의 활동의 결과물을 인정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해당 경제주체의 위치에 전이해서 생산물로 표현된 열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감 혹은 타인의 공감을 통해 자신의 사적 이익 추구에 대한 타인의 승인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자신의 열정과 사적 이익 추구를 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일정 범위 내로 제한하는 경향을 초래한다. 이처럼, 두 경제주체 간의 거울놀이처럼 진행되는 공감 작용을 통해 두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 간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하지만 이 교환비율은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한 비율일 뿐으로 당사자 외 제3의 경제주체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평가는 되지는 못한다. 사적 이익은 여전히 사회적 표현을 획득하지 못한 상황이다.
사회적 평가로 진화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교환의 외연적 확장이다. 한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과 교환될 수 있는 대상이 경제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경제주체의 열정의 산물로 확대된다. 외연적 확장 전에는 두 주체 사이에서 이뤄지던 거울놀이인 공감작용이 교환의 외연 확장과 함께 한 주체와 그외 나머지 주체 간의 일대일 공감작용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외연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공감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교환비율은 여전히 사회적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즉 자신의 열정의 산물의 평가를 공감을 통해 다른 경제주체들의 열정의 산물과의 일대일 교환비율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가지수만 증가했을 뿐 앞에서 말한 사회적 평가가 되지 못한 이유는 여기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즉, 일대일 교환비율 수가 증가하는 것만으로는 교환비율이 사회적으로 공인된 교환비율이 되지 못한다.
사적 이익이 사회적 표현을 획득하는 것은 스미스의 체계에서는 공정한 관객의 존재와 연결돼 있다. 공정한 관객은 특정 개인들의 사적 이익을 다른 개인들의 사적 이익보다 선호하는 편향성을 가지지 않은 주체로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한 관객의 행동은 수많은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정의'만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정한 관객은 사법 체계를 닮았다. 사법 체계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하지만 개인들이 모두 사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사법 체계는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는 일정 범위 내로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권리를 보장함에 있어 사법체계에 내재한 제한은 공정한 관객의 행동을 반영해야 한다.
공정한 관객은 개인들의 사적 이익 추구가 만들어 내는 복잡한 관계를 사전적으로 초월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우리의 견해와는 반대로, 모든 개인들이 공감 작용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공정한 관객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공정한 관객은 신중함의 미덕을 실천하는 개인으로서, 그의 사적 이익 추구는, 공감 혹은 타인의 공감과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도덕적 승인의 경험을 통해, 즉각적으로 타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는 것이다.
공정한 관객의 출현은 로크에게서 자연상태의 종말을 가져오는 사회계약의 성립에 비유할 수 있다. 로크는, 홉스와 달리, 소유권을 정치권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에서도 이미 형성된 것으로 인식했다. 로크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어떤 물건을 사용하려면, 인간은 자연의 상태에서 발견한 그 대상에 자신의 노동을 첨가해야 한다. 바로, 이처럼 노동을 첨가하는 과정에서, 그 물건에 대한 소유권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로크는 자연상태의 사회적 성격을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적 상태에서 출현한 소유권도 다른 사회구성원과의 공존이 가능할 수 있도록 도덕적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로크는 소유권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제한을 둔다. 소유하는 행위가 타인을 해치거나 타인에게 빈곤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모든 낭비는 비도덕적이어서 금지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이러한 제한이 생산과 소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노동에 의지한 부의 축적은 그 양이 제한적이어서 상기한 두 가지 제약조건이 실제로 노동이나 축적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발휘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폐의 등장은 모든 상황을 변화시킨다. 로크에게 있어, 화폐는 자연상태에서 등장한다. 화폐는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부의 저장을 가능하게 한다. 부패하지 않는 특성으로 인해 화폐는 무제한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로 인해, 사회구성원 간에는 부에 대한 욕망이 충돌하기도 하고, 부존량이 제한적인 천연자원의 사용을 두고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이 나타난다. 즉, 로크가 제기한 두 가지 제약은 화폐의 등장과 함께,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도덕에 관련된 자연법칙이 명백하고 이성의 도움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폐의 출현으로 발생한 이해상충은 자연적인 사회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로크의 해결책은 자연상태를 포기하고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권력을 세움으로써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연법칙, 특히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다시 돌아가면, 개인의 열정 추구가 해당 개인의 입장에서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사적 이익의 추구가 사회적으로 최선의 결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표현을 획득해야 한다. 케인즈의 고용수준은 그러한 사회적 표현의 한 사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