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그리고 하얀여름의 추억
지난 주말 시바타 쇼의 소설집 '하얀 여름의 추억' 일기를 끝냈고 크리스토퍼 놀라의 영화 '인터스텔라'도 봤다.
'떠남'이라는 소재를 통해 영화와 소설을 함께 묶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인터스텔라에서는 전직 우주비행사 쿠퍼가 그의 가족과 농부로서의 일상을 떠난다. 지구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 인류를 구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의는 부정되고 여정은 난관에 봉착한다. 하지만, 또 다른 떠남이 이어진다.
영화 속에서, 떠난다고는 하지만, 그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모든 여건이 허락하면 돌아올 수도 있는 떠남이고 쿠퍼가 그의 딸에게 한 약속때문에 돌아와야 하는 떠남이었다. 영화의 말미에 이뤄지는 떠남은 돌아올 기약은 없지만, 여전히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고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시바타 쇼의 작품집에 실린 두 소설, '하얀 여름의 추억'과 '내내 서 있는 내일'는 정해진 목적지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그리고 함께 할 누군가도 없는 떠남을 그리고 있다. 첫 번째 소설에서는 인생의 20대에 그리고 두 번째 소설에서는 40대에 일어난 떠남이 소재가 돼 있다. 두 작품에서 떠남의 주체는 모두 여성이다.
첫 번재 소설에서는 아무런 의미없이 직업으로서 대학 선생을 꿈꾸는 어린 시설 친구와의 결혼을 앞두고 삶의 의미를 결혼으로 채우고자 한 자신을 발견하고, 가족, 약혼자, 기존의 직장 모든 것을 버려두고 낯선 곳으로 떠난다.
두 번째 소설에서는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역할을 훌륭하게 대신해 준, 부유한 삼촌의 품에서,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포기했으나 성실한, 대학시절 친구인 남편 품으로 이동해서, 아이 하나를 기르면서 두 번재 아이를 임신한 여성이 결혼생활 10여년 후에 가정을 떠나는 것이 묘사돼 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여자 주인공의 떠남을 받아들일 뿐 그들이 먼저 떠나는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삶의 허망함에 눈과 귀가 멀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돛대에 묶고 항해를 지속하는 존재처럼 그려진다.
떠남의 동기는 인류구원이나 계급혁명 같은 대의가 아니다. 영화와 소설에서 대의는 부정되거나 부재한다. 영화에서 인류구원의 대의가 행사하는 폭력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상황에서 여정을 결정하는 것은 사랑이었다. 소설에서는 50년대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하고 계급혁명의 꿈을 공유했던 세대의 동경 지역 대학 출신 여성에게는, 한 남자의 아내라는 지위는 인생을 사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주인공의 자각이 떠남의 동기였다.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동요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꼼꼼한 작가의 문체는 20대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에서보다 40대 문제를 다루는 작품에서 더 좋았다. 작가의 발전 탓일까 아니면 현재 내와 유사한 나이를 가진 사람들을 다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