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의 기원

경제와 정치 혹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

invisibleman 2014. 9. 4. 18:09

"일반이론" 18 '고용의 일반이론 재설'에서 케인즈는 파라메터, 독립변수 그리고 종속변수로 이루어진 그의 거시경제 모델의 구조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케인즈의 거시모형은 어느 시점에서 주어진 경제체계의 사회구조, 현존하는 노동 및 자본의 질과 양 등을 파라메터로, 한계소비성향, 자본의 한계효율, 유동성선호, 화폐임금율 그리고 화폐량을 독립변수로 하여 국민소득과 고용량을 결정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 케인즈 혹은 거시경제학자는 경제체계 전체의 고용규모에 관심을 가지는가?

케인즈 모형에 포함돼 있는 두 주체는 기업가와 노동자다. 기업가들은 주어진 자본설비를 어떤 규모로 가동할 것인지 즉,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노동 몇 단위를 고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자는 자신의 고용 여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모형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경제주체도 경제체계 전체의 고용규모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 세 번째 주체가 등장한다. 이 주체는 경제모델에 포함돼 있는 기업가나 노동자와는 달리 경제 모델 외부에 존재한다. 세 번째 주체는 국가, 혹은 전체 고용규모를 일정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정책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인이다. 케인즈는 이 세번째 유형의 주체의 관점에서 고용량을 종속변수로 하는 모델을 구성했고 또 그 모델을 통해, 고용량을 일정 수준에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의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변수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렇게 국가 혹은 정치인은 모델에 포함된 주체가 아니라 모델을 구성하는 주체다.

 

케인즈의 사례는 경제학이 정치와 가지는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18세기 정치경제학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는 아담 스미스가 그의 두 저작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전개한 입법자의 과학을 통해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스미스의 용어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역할을 명확히 하는 것이 이 글의 내용이 될 것이다. 스미스의 경우에도 경제모델 외부에 존재하는 주체가 존재한다. 바로 공정한 관객(the impartial spectator).

 

스미스가 활동하던 18세기에서 과학은 소수의 원칙과 연역의 방법으로 도출되는 명제들로 구성되는 체계였다. 원칙의 수가 적을수록 그리고 설명되는 현상이 많을수록 좋은 과학체계가 된다.

 

스미스의 입법자의 과학은 인간 심리에 관한 전제에서 출발해 자연법 체계의 성립을 지향한다. 스미스에게 있어 자연법은 모든 국가들이 운용하고 있는 법들 속에 내재해 있고 토대가 되는 일반원칙들이다. 입법자의 과학은 크게 4가지 주제로 구성된다: 소유권의 보장과 관련된 정의(justice); 위생, 안전, 치안, 국내 및 국외 교역의 권장 등을 포함하는 내치(police); 조세부담의 배분과 관련된 세입(revenue); 외국의 침입에 대해 국가를 방위하는 것과 관련된 국방력(arms). 이러한 주제들로 구성된 입법자의 과학은 입법자의 활동이 국가의 정의와 풍요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지침의 역할을 한다. , 입법자의 과학은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에서 출발해 국가의 정의와 풍요를 생산하는 메카니즘을 분석하기 위해 도덕철학과 정치경제학을 이용한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인간 주체의 동기와 자기이해에서 출발해 사회현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연결된 소수의 원칙들의 체계다. 따라서, 도덕철학은 사회의 규칙성과 조화뿐만 아니라 이것을 만들어내는 인간 주체의 심리적 요인들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적절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토마스 홉스는 도덕철학을 인간이 타인과 맺는 관계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자연법에 관한 과학으로 분류했다. 홉스에 의하면 평화로운 관계와 사회의 형성과 유지에 기여하는 것이 선이고 도덕적인 덕인 반면,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거나 전쟁을 초래하거나 혹은 사회의 지속성을 해치는 것을 악 혹은 악덕이다. 자연법이 '남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만큼, 자연법에 대한 과학이 도덕철학이 된다.

 

인간주체의 심리학적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의미에서,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홉스의 개념보다는 허치슨의 개념에 보다 더 가깝다. 왜냐하면, 감정과 취향의 다양성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유래하는 행위와 대상의 다양성 그리고 가변적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타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등 요인의 복잡함으로 인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많은 자연적 욕구 등으로 이뤄져 혼돈처럼 보이고 일관되지 못한 원칙들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본성에서 자연적인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원칙들을 찾는 것이 허치슨의 도덕철학이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심리, 즉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명백히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함에도 다른 이의 흥망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동일하게 자신의 감정, 열정, 행위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 주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심리기제가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이러한 심리기제가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는 '동감(sympathy)'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동감은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처지에 이입하여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동감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런 판단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열정을 타인들이 동감을 통해 긍정적인 판단 혹은 승인해 줄 것을 바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은, 스미스에게는 모두가 무대에 서 있는 동시에 객석에 앉아 있는 연극무대와 유사하다. , 소통은 타인이라는 관객 앞에서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설득하려고 동감을 통해 도덕적 승인을 이끌어내려는 인간 주체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감에 내재해 있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무대와 객석 간의 거리로 인해, 관객인 타인은, 무대 위에서 도덕적 승인을 요구하는 한 인간 주체의 감정, 열정, 행동에 항상 전적으로 이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전적인 동감이 쉽지 않다는 문제로 인해, 무대 위의 주체는 객석에 있는 관객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이나 열정을 본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먼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관객의 반응은, 스미스에 의하면, '적정성(propriety)'에 의해 좌우된다. , 통상적으로 유사한 환경에서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기준으로 어느 정도의 편차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는 적정성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동을 동감하고 승인한다. 따라서 타인의 동감을 얻으려는 심리기제는 우리에게 먼저, 타인이 승인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행동을 완화하도록 이끈다.

 

타인이 동감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와 감정을 완화하려는 노력들은 도덕률로 진화한다. 스미스의 체계에서,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도덕률은 선과 악에 대한 이성의 판단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소통과 관련된 개인들의 경험이 모여 형성됐다. 도덕률은 동감을 통한 타인의 승인을 추구하는 본성에서 유래하여,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자기애(self-love)가 타인이 허용하는 혹은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 타인의 승인을 얻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에 따라, 모든 개인들은 자신의 행동과 감정을 억제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라는 개체의 유지에 필요한 도덕적 규율이 성립된다.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또 다른 개념을 채택해 도약을 한다. 그 개념은 '공정한 관객(the impartial spectator)'이다. 공정한 관객은 '가슴속에 있는 내부인간 (the man with the breast)', '위대한 동거인 (this great inmate)', '경외롭고 존경스런 판사 (this awful and respectable judge)', '전지적 심판자 (the all-seeing Judge of the world)'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지적 심판자인 공정한 관객이 어떤 개인의 행위를 승인한다면, 그 주위의 사람들이 그의 행위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공정한 관객은 개인과 그가 이입할 수 있는 관객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의 결여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다. , 공정한 관객의 관점을 통해, 스미스는 도덕적 규율이 가질 수 있는 우연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성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보편성으로 인해, 공정한 관객은 도덕적 규칙이나 도덕적 판단을 비판할 수 있다.

 

스미스의 입법자 과학에서 공정한 관객은 왜 등장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공정한 관객이 '적정성'과 이어져 있고 적정성은 다시 '정의(justice)'의 개념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스미스는 "법학 강의Lectures on Jurisprudence)"에서 침해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정의의 목적이라고 규정한다. “도덕감정론에서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항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침해를 입히[1], 불의가 만연한 상황에서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다고 한다.

불의 혹은 부정의로 인해 침해받는 대상이자 정의가 보호하려는 대상은 그 실현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제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perfect rights)'로 한정된다. , "우리가 이웃에게 어떤 상해도 주지 않고, 그의 인격이나 그의 명예를 직접 손상시키 않"[2]는 것이 정의가 지향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에 의하면, 이러한 정의는 '조정적인 정의(commutative justice)'에 해당한다. , 법이 허용한 재량권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매매계약 같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적정한 교환비율을 통해 참여자 모두가 이익과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스미스의 정의가 지향하는 것이다. 이 적정한 교환비율은 그의 국부론에서 자연가격으로 발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과 구별되는 스미스의 정의의 개념이 가진 특징은 산술평균처럼 이성을 통하거나 사전적으로 규정된 법과의 부합 여부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도덕감정인 동감의 작용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침해가 중요성을 가진다. , 침해의 발생이 완전한 권리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타인의 기쁨보다는 고통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고 그의 분노의 표현 중에서 더 많은 것을 적절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침해를 복수하기 위해 사용되는 폭력도 승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스미스에게 있어, 정의가 보호해야 하는 완전한 권리는 동감이라는 도덕감정의 작용으로 생성된다.

하지만, 동감의 작용에 의한, 침해에 대한 보복의 승인은 침해와 보복의 끝없는 악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의를 규정하는 동시에 불필요한 침해와 보복의 악순환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공정한 관객이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공정한 관객의 관점에서 국가는 민법이나 형법과 같은 법규를 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규들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입법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입법자의 과학이다. 보편적인 원칙으로서 자연법(natural jurisprudence)을 각국의 법률들이 모두 공유하게 되는 것도 입법자의 과학의 기여다.

공정한 관객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입법자의 관점이 된다. 그리고 입법자의 입법활동을 통해 국가가 법률 체계를 갖추게 되면, 동감능력을 기반으로 도덕률을 추구하던 주체들은 더 이상 상대방 혹은 이웃을 대상으로 감정이입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공정한 관객의 관점은 민법이나 형법의 조문을 통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 법을 통해 마련된 정의 구현장치가 도덕을 대체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동감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동감능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시회 구성원들이 법과 국가권력에 기꺼이 부여하는 권위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사법체계에 대한 도덕적 승인을 지칭하는 효용이다.

 

도덕감정론에서 나온 입법자의 과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자애(self-love)를 추구하는 동시에 타고난 동감능력으로 인해 타인의 도덕적 승인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인이 공감하여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규정된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동감능력에 기반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도덕률이 형성된다. 그러나 도덕률만으로는 사회의 조화나 질서가 성립될 수 없다. 사회의 질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관객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정의의 규칙들이 필요하다. 이 정의의 규칙은 입법자들의 입법활동과 정부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행된다. 입법자의 과학은 바로 이 과정에서 기여한다. 법령체제를 갖춘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은 법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개인들의 상호과정에 내재한 조정작용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법령체계에 의한 조정은 보이는 손으로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도덕감정론은 사회질서를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균형으로 설명한다.

 

이 글은, 아담 스미스의 대표적 저작인,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간에는 19세기 일군의 독일 경제학자들이 '아담 스미스의 문제(Das Adam Smith Problem)'라고 불렀던 괴리가 존재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두 책은 모두 공통된 방법론과 설명원리들을 가지고 제반 사회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엽법'에 관한 과학인 도덕철학의 범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이하에서는 도덕감정론에서 발견했던 입법자의 과학이 국부론에서는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스미스의 체계에서, 부를 추구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동기는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감을 통해, 부는 추구하지만 가난은 피하고자 하는 인간 고유의 감정을 공유하는 동류로부터 도덕적 승인을 받고자 하는 열망이다.

도덕감정론에서 타고난 동감 능력으로 인해 타인의 도덕적 승인이 필요하듯, 국부론에서 인간은 교환하는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노동의 사회적 분업구조를 형성해서 타인이 생산한 재화를 교환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로 규정된다. , 인간들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게 되면, 이 교환성향에 의해 노동의 사회적 분업이 형성된다. 분업이 형성되면 생존이나 욕망충족을 위해 필요한 재화 중에서 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된다. 대신 개인은 스스로 노동투입량을 조정하여, 자신의 생산물이 필요량을 초과하여 잉여가 존재할 수 있도록 생산한다. 자신의 잉여생산물을 대가로 타인의 생산물 중에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거나 욕구를 충족하는데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모든 개인은 생존을 교환에 의지하게 되면서 생산자이면서 상인이 되고 사회는 상업사회로 진화한다.

 

상업사회에서 동감능력은 노동생산물 간의 교환비율을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자본의 축적과 토지 사유화가 진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A상품과 B상품 간에 교환이 이뤄진다고 하면, 일정량 B상품과 교환되는 A상품의 일정량의 가치는 그가 구매할 수 있는 B상품의 일정량을 해당 생산자가 생산하는데 소요되는 노동의 양으로 정의된다. 자본의 축적과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면, 생산물의 가치는 해당 생산물 일정량과 교환되는 일정량의 또 다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되는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에 대한 적절한 보상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만든 생산물 중 일부를 다른 사람이 생산한 생산물 일정량과 교환하기 위해서는 교환 상대방이 내가 수요를 가지고 있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하한 노동, 자본 토지의 양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자신이 원하는 생산물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우연적인 만남에서 서로 만족하는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각자 교환 대상물을 생산한 생산자의 처지에 이입하여 교환에 필요한 양의 해당 생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의 양을 추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감의 작용을 통해, 두 생산물 간에 교환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교환비율이 결정된다.

 

가격이 결정되는 방법은, 각자가 생산한 상품이 우연히 상대가 가지고 있는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경우에 두 생산물의 일정량 사이에서 교환비율이 형성되는 것과는 다르다. 교환비율을 통해 교환이 이뤄지는 사회와 가격의 도움으로 교환이 이뤄지는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가격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교환은 우연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독립적인 경제주체들이 교환을 목적으로 사회적 분업체계에서 특화한 상품을 생산한다. 그리고 가격은 표시 수단으로 화폐의 존재를 전제한다. 따라서, 화폐를 주조하고 사회에 공급하는 사회 외부의 기관도 전제된다. 또한, 하나의 상품에 대해서는 동일한 가격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가격의 존재는 시장의 존재를 전제한다. 스미스 체계에서 국부의 원인은 시장의 확대다. , 경제활동에서 자애 혹은 자신의 이익 추구를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편익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가격기구에 의해 조절되는 경쟁시장과 노동의 분업구조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장의 기원은 동감작용에 의한 교환의 확대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사회질서의 기초가 되는 정의가 동감에 기초한 도덕률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국부론에서는 스미스는 가격을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으로 구분한다. 먼저, 어떤 생산물의 시장가격은 시장에 출하되는 양과 이 생산물에 대한 유효수요의 비율로 결정된다. 유효수요는 시장에서 해당 상품을 획득하는 대가로 그 상품의 자연가격을 지불하려는 사람들이 시장에 제시한 화폐의 수량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화폐량과 출하량의 비율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가격은 상품 1단위와 교환되는 화폐량으로 정의된다.

반면, 자연가격은 해당 생산물을 시장으로 가져오기 위해, 평균적인 혹은 적정한 수준으로 지불해야 하는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총액으로 정의된다. 자연가격의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평균적인 수준은 해당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에 출하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노동, 자본 그리고 토지에 대한 대가를 자연적인 수준에서 지불하는데 과부족이 없는 수준이다.

이 자연적인 수준은 해당 사회의 상황, '부유한가, 빈곤한가, 진보하고 있는가, 정지하고 있는가, 쇠퇴하고 있는가'에 좌우된다. 하지만, 스미스의 국부론에서는 자연임금률, 자연이윤율, 자연지대율은 물론 자연가격의 결정이론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조건 하에서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의 자연적인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공정한 관객'이다.

임금의 수준은 노동자와 자본소유자의 계약을 통해 결정된다. 하지만, 교환비율을 결정할 때와는 달라,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받기를 원하고 자본소유자는 더 적은 임금을 주기를 원한다. 임금교섭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소유자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적은 임금을 위해 각자 다른 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자본가들과 단결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한다. 동감작용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소유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임금수준을 찾을 수 없다.

스미스는 자연적인 임금수준이 노동자가 충분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수준에서 결정돼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러한 주장은 "완전한 정책, 상업과 제조업의 확장" 같은 '고상하고 웅대한 목적'을 추구한다는 미학적인 판단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미학적 판단의 타당성은 공정한 관객이 제공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에 의해 시장가격은 자연가격으로 수렴하게 된다. 이러한 수렴은 생산요소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모든 생산부문의 수익률을 동등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이뤄진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으로 노동, 자본, 토지 등 생산요소를 소유한 경제주체들은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생산과정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통해 사회는 최대한으로 풍족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도덕감정론에서 입법자의 주요 역할은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법체계를 마련하는 것이었듯이, 시장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경제활동과 관련한, 입법자의 과학의 기본 역할 역시 사회 질서 혹은 시장이 작동할 수 있도록, 정의의 원칙에 따라 법률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법률체계의 핵심은 완전환 권리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보호다. 정의의 원칙에 따른 법률체계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행위가 사회와 국가의 풍요로 이어지기 위한 충분조건이다.

두 번째 역할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현재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스미스에게 있어 이것은 중상주의라 불린 정책과 제도의 개혁을 의미한다. 이들 정책과 제도는 교역의 대상이 되는 상품의 생산자에게 독점과 특혜를 제공하는 체계를 구성함으로써, 특혜를 받지 못하는 다른 생산자가 자신이 소유한 생산요소를 자기 이익을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들에게 불의를 가하기 때문이다.

경제영역에서 입법자 과학이 맡은 마지막 역할은 공공사업과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스미스는 공공사업과 제도는 사회에 아주 유용하지만, 비용을 특정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수익이 충분하지 않아 개인이 설립하여 유지하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한다.

 

스미스의 입법자 과학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서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전개돼 있다. 출발점은 모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감정은 동감능력이다. 인간은 이 감정을 가지고 자애 혹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전제된다. 사회 속에서 이러한 인간의 상호작용은 각각 도덕률로 혹은 교환관계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연역체계의 성격을 가지는 스미스의 과학은 도덕률에서 정의의 원칙으로 그리고 교환관계에서 시장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논리적 비약을 한다. 비약을 내포하고 있는 정의의 원칙과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스미스의 과학에 의해 인도된 입법자들이 마련한 법령체계라는 보이는 손의 개입이 필요하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통해 주장한 입법자의 과학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적절한 균형을 통해서만 정의와 사회의 물질적 충족이 이뤄질 수 있음을 분석하고 있다.

 



[1] 스미스, 도덕감정론 p. 163

[2] 스미스, 도덕감정론 p. 517